'2015/01'에 해당되는 글 34건

  1. 2015.01.30 제가 한번 색칠해 보겠습니다
  2. 2015.01.30 《왜 고전을 읽는가》 - 왜 읽냐건 웃지요
  3. 2015.01.28 《공룡 이후》 -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이야기
  4. 2015.01.28 박완서는 아직도 여전히
  5. 2015.01.27 장샤오헝 《느리게 더 느리게》
  6. 2015.01.27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달리기가 가르쳐준 삶의 의미에 대해
  7. 2015.01.26 작가 각자
  8. 2015.01.26 《Paint It Rock》 - 만화라고 우습게 보지 마라
  9. 2015.01.23 《소비를 그만두다》 - 왜 사는데
  10. 2015.01.22 《느릅나무 아래 욕망》 - 원하고 욕망하죠

제가 한번 색칠해 보겠습니다

 

 

 

 

제가 한번 색칠해 보겠습니다

 

살까 말까 살까 말까.
뒤적뒤적 어슬렁어슬렁.

 

서점에 들어서면 제법 큰 규모로 마련해 놓은 ‘컬러링북’ 매대에 눈이 갑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컬러링북은 지금 그 인기에 힘입어 ‘자기진화’ 하는 모습입니다. 원조 격인 『비밀의 정원』을 필두로 『컬러링 cafe』 『파리시크릿』 『아트테라피』 등 종류만 해도 수십 종. 여행, 자연, 명화, 인형 등 주제 또한 다양합니다. 어엿한 하나의 장르를 이뤘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앞서 살까 말까 구매를 고민하던 이유는 이렇습니다. 『비밀의 정원』을 한 장씩 넘기다 보니 난이도가 상당했기 때문이죠. 첫 장을 넘길 때 ‘이걸?’ 다음 장에서 ‘맙소사!’ 책을 닫으며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이 차례로 들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색칠의 세계에 입문하기 전 이야기입니다. 이미 '색칠 공부' 세계에 푹 빠진 독자들의 반응은 어떨까요.

 

"칠하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이 안 나서 좋아요."

"잡념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손목은 조금 아프지만요."

"사림을 완성한 후 뿌듯함이 느껴져요!” “어린 시절의 내 모습과 마주할 수 있다는 점이 정말 행복해요."

"신비로운 패턴을 칠하다 보면 집중이 잘돼요.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던 고민과 걱정도 잊히는 것 같아요."

 

지인의 추천으로, 혹은 색칠해본 사람의 입소문으로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컬러링북. 지나가는 유행일 것이란 생각은 기우였습니다. 현재 베스트셀러 20위 중 8권의 책이 컬러링북입니다. 독자들의 반응은 물론 판매 추이, 출간 종수를 보더라도 쉽게 꺼지지 않을 열풍에 가깝습니다.

 

각설하고, 컬러링북의 최대 장점 중 하나는 집중하는 즐거움 아닐까요. 색칠하는 동안 맛본 몰입의 기쁨은 생각보다 꽤 컸습니다. 자율의지로 색을 선택해 온전히 내 뜻대로 결과물을 완성하는 재미! 마감이 없으니 조바심낼 필요도 없고요. 단지 ‘내 앞에는 컬러링북이 있고, 나는 색칠한다.’와 같이 조금은 단순한 마음으로 접근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지나치게 많은 생각에 사로잡힌 현대인이기에, 종종 우리는 의식적으로 생각을 단순화할 필요도 있으니까요.

 

연관도서

 

 

|Editor_김민경

mins@bn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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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전을 읽는가》 - 왜 읽냐건 웃지요

 


 

이탈로 칼비노 | 《왜 고전을 읽는가》 | 민음사 | 2008

나의 어릴 적 꿈은 시인이었다. 그러나 나는 소위 말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시를 써 당선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나의 시는 언제나 허공을 맴돌 뿐 다른 이들의 마음을 울리지 못했다. 전라북도 무주 산골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나는 어느 추운 겨울날 아이들과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읍내에 하나밖에 없는 편의점을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우리와 함께 마치고 내려온 담임 선생님과 그의 오랜 친구였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그에게 나를 소개했다. 우리 학교 대표로 지난번 글짓기 대회에 나갔던 아이라고, 자네도 읽어보지 않았느냐며 말이다. 그는 나의 이름을 듣고는 "아~, 너 수필 썼었지?" 하며 아는 체를 해 주었다. 그리고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 그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작가 ‘안도현’이라고.

나는 그날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편의점을 떠나 학교 기숙사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가 나의 담임선생님처럼 어느 산골의 교사일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 나는 대학에 진학했고, 그의 이름을 좇아 그의 시들을 읽었다.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들을 후회했다. 오래도록 나의 꿈은 글의 언저리를 따라 있었다. 하지만 수능 점수와 장학금을 따라 진학한 대학은 나에게 오랜 꿈과는 거리가 먼 삶을 선물했다. 초, 중, 고를 지나면서 한 번도 꿈꾸어보지 않았던 '교사'라는 삶을. 나는 교사로 살면서 오래도록 꿈을 잊고 살았다.

꿈을 잊고 책을 읽지 않는 건 매우 쉬운 일이었다. 아이를 낳고, 기르고, 하루를 보내는 데만 집중하면 됐었다. 나는 스스로에게조차 잊히고 있었다. 이제 서른 중반을 찍으며 나는 다시 꿈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제는 꿈이라기보다 바람에 해당하는 일들을 생각했다.

오랜 질문의 답을 찾기라도 할 듯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를 펼쳤다. 하지만 서문을 제외하곤, 이탈리아의 작기인 칼비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칼비노의 렌즈를 통과한 생소한 '고전'들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역자도 밝히고 있듯, 그가 소개하고 있는 작품들 중 몇몇은 아예 우리나라에는 번역조차 되어 있지 않을 만큼 생소하다. 그러나 칼비노의 렌즈는 그 생소함에 다소 활력을 불어 넣는다. 가끔은 시선을 멈추고 밑줄을 긋게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돈키호테의 전신 격에 해당할 만한 ‘티랑 로 블랑’에서,

중요한 것은 이제 기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책이 하나의 텍스트로서 갖는 가치이다. 이것은 책과 삶을 구분하지 않고 책 바깥에서도 신화를 찾고자 하는 돈 키호테의 가치관과는 반대되는 가치관이라 할 수 있다. (91쪽)
라고 말하는 부분이나,

그 순간 삶 자체는 책 안에서 서술되고 있는 형식으로 변모하게 된다. (97쪽)

라고 평하는 부분이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티랑 로 블랑’에서 그가 발견한 돈 키호테의 가치관, 삶과 책의 일치를 푼 문장을 보며,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건네고 때로는 고민을 또 때로는 위안을 준다. 그러나 책은 책 밖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혹 순진한 독자가 책 속의 말들을 따라하고 책이 권하는 일들을 그대로 행해도 책에서 말하는 기적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책은 청춘의 아픔을 논하고 따스한 말을 해 줄 수 있지만 청춘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러나 여전히 돈 키호테와 같이 책 속의 일들과 책 밖의 삶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는 많다. 그러면 왜 책을 읽는가?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고전이 어렵다면, 그 말을 ‘책’으로 바꿔볼 수 있다.

"왜 책을 읽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효율로 또 어떤 이에게는 공감, 또 어떤 이에게는 행동으로 다가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칼비노가 서문의 마지막에 인용하고 있는 시오랑의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어떤 목적이나 유용성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냥" 혹은 "그래서"에서 해당될 만한 ‘소크라테스의 이야기’. 곧 죽음을 선사할 독약이 만들어지는 그 앞에서도 악기를 배우는 소크라테스가 남긴 말이다.

"그래도 죽기 전에 음악 한 소절은 배우지 않겠는가?"

그저 배우고 싶고, 알고 싶다는 욕망만큼이나 강력한 것은 없다. 나를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이 한때 놓아버렸던 꿈의 언저리로 돌아가려는 이유도 그저 그냥 그러고 싶어서다. 그렇게 해 보고 싶은 열망과 정열 때문일 것이다. 칼비노의 책은 서문을 제외하고는 인내심을 가지고 읽었다. 정확히 나는 읽었다. 글자를 말이다. 어려운 내용이었고, 그가 소개한 책들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끔 어디선가 본 듯한 세르반테스, 톨스토이, 디킨스, 헤밍웨이를 만나면 반가울 따름이었다. 그러니 기억에 남은 것도 많지 않다. 다만, 그가 고전을 읽으며 다가서려 했을 삶의 근원을 다시 생각해 본다.

이 책을 덮고 나는 올 한 해 여러 엄마들과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리딩살롱’이라는 이름으로 만나, 한 달에 한 권 책을 읽는다. 나는 엄마들이 왜 그토록 열심히 책을 읽고 고민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들 또한 한때 놓아버린 꿈과 읽고 싶다는 열정에 이끌렸을 것이다. 여전히 책을 읽는 이유, 읽어야 하는 이유는 고민의 대상이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다시 책을 펼치고 이야기를 나눈다. 언젠가 고민의 결과가 한 편의 글로 태어나는 날이 오길 바란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apranihita'님은?

읽고 보고 듣고 느끼고 쓰는 일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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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 이후》 -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이야기

 


도널드 R.프로세로 | 《공룡 이후》 | 뿌리와이파리 | 2013


1억 년이나 넘게 종을 유지하며 중생대를 대표했던 공룡은 상업적으로나 순수한 지적 호기심으로나 크게 성공한 ‘아이템’이다. 특히 공룡의 멸종이 6,500만 년 전에 있었던 운석 충돌과 연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대중의 관심은 더욱 증폭되었고, 관련 책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렇듯 지대한 관심에도 공룡의 직계 후손이 우리 눈앞에서 보란 듯 생존해 있음을 아는 사람은 얼마 없다. 또한, 거대한 비조류 공룡들이 멸종한 덕분에 우리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가 지구를 점령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우리의 관심 밖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빙하 시대이며 인류 문명의 역사는 빙하 시대 사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따뜻한 시기인 ‘간빙기’가 1만 년 정도 특별하게 연장된 덕분에 꽃 피웠다는 사실 또한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듯하다. 공룡 덕분에 백악기, 중생대, 고생대라는 지질학 용어는 일반인들의 귀에도 낯설지 않을 정도로 흔해졌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사는 신생대라는 말은 왠지 낯설고, 신생대를 다룬 책도 중생대나 고생대를 다룬 책보다 드물다. 그렇기에 도널드 R. 프로세로의 『공룡 이후』라는 제목은 더욱 눈에 띄며 발견자의 침체한 호기심 세포를 빠르게 자극하기 충분하다.

비조류 공룡이 멸종한 이후 6,500만 년이 지나는 동안, 지구 환경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온난화와 한랭화가 번갈아 찾아오면서 현재의 사막이 사바나나 초원이 되었던 시기도 있었고, 현재 사람이 살기 적당한 곳이 빙하로 뒤덮여 불모지가 되었던 시기도 있었다. 다양한 생명체들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멸종과 진화를 거듭하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는 약 200만 년 전에 시작된 플라이스토세의 빙하 시대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고기후학적 증거에 나타난 바로는, 보통 ‘간빙기’(빙하 시대 중 기후가 따뜻한 시기)는 약 10만 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빙하 주기에서 겨우 1만 년 정도만 지속한다. 지질학적 시간으로는 ‘찰나’에 버금가는 이 ‘1만 년’ 덕분에 인류의 문명은 지금과 같은 화려함을 뽐낼 수 있다. 만약 그 1만 년이 없었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아직도 돌도끼를 들고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며 배회하고 있을 것이며, 이 글을 쓰는 필자 역시 동굴 입구에 쭈그리고 앉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리며 오늘 잡을 사냥감을 위해 열심히 돌을 갈고 있을지도. 믿기 어렵지만 인류의 문명은 우연한 결과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그 1만 년의 간빙기 와중에도 소규모의 온난기와 한랭기가 있었고, 그러한 기후 변화는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홀로세에서 가장 따뜻했던 시기인 BC 5000~BC 4000년에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계곡, 중국의 위대한 문명(황허 문명)이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BC 1200∼ BC 800년에는 기후가 다시 변하기 시작했고 앞서 문명이 꽃피웠던 지역 곳곳에 홍수와 가뭄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자연재해를 신의 분노로 재앙이 닥친 것이라 해석했지만, 사실은 기후변화가 그 원인이었다. 기후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미케네나 마야 문명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중세에도 기후변화는 계속되었다. 기후변화는 역사학자 바버라 터크만이 ‘비참한 14세기’라고 일컬었던 대기근을 불러왔고, 30년 후에는 흑사병을 일으켜 유럽을 죽음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따뜻해진 그린란드와 래브라도 반도에 정착했던 바이킹족은 다시 찾아온 기후변화 때문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전멸했다. 지구의 기후는 19세기 소빙하기를 끝으로 온난화에 들어섰고 이후 거의 2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인류의 문명이 꽃을 피웠던 축복받은 간빙기, 그 1만 년의 짧고도 긴 시간의 끝은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그것이 문명의 종말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 준비도 안 되어 있다면 우리의 문명은 심각한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

연간 1만 7,000종에서 많게는 연간 10만 종이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고 있다. 고생물학자들이 추정한 ‘기본’ 멸종 속도, 다시 말해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을 때의 멸종 속도는 4년에 1종꼴이다. “심지어 ‘5대 대멸종’의 멸종 속도도 이보다 10배 이상 높지 않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인간이 자연을 무지막지하게 착취한 응분의 결과이다. 리처드 리키와 로저 르윈은 이를 ‘여섯 번째 멸종’이라고 부른다. 정말 영광이지 않을 수 없다. 46억 년 지구 역사에서 우리는 여섯 번째 대멸종의 격변기를 직접 체험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간은 스스로 꽃피운 문명을 뒤돌아보며 자신들을 특별한 존재로 자부한다. 그러나 시간에는 당할 자가 없듯이 그러한 이들도 우주의 길고 큰 역사 속에 묻혀버렸거나 묻힐 것이다.

우리 또한 지구와 태양의 종말이 오기 전에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지 않는 이상 다사다난했던 인류 역사의 장을 마칠 것이다. 우주가 탄생하고 수많은 은하와 별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긴 역사에서 우리 은하에 적당한 크기와 밝기의 태양이 존재하고 그곳에서 적당한 거리에 지구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혹독한 빙하 시대 중 잠시 따뜻했던 기후 덕분에 번창한 인류 문명을 보면 우리의 존재가 특별하다기보다는 이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은 다름 아닌 ‘우연’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경이로운 우주의 놀라운 모든 것들이 이 ‘우연’ 속에서 탄생하고 ‘우연’ 속에서 죽었다. 우리의 삶 또한 ‘우연’의 연속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 ‘우연’ 덕분에 화사하게 꽃 핀 우리의 문명이, 이번에는 ‘우연’이 아닌 인류의 오만방자함이 불러온 ‘필연’ 때문에 시든다면 이 얼마나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인가.

우리의 모든 문명은 홀로세라고 하는 짧은 온난기의 산물이고, 우리는 지금 그 홀로세의 끝을 바라보고 있다. 그 끝은 너무 더울수도, 또는 너무 추울 수도 있다. 우리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자연이 앞으로도 계속 호의적이리라는 가정은 더 이상 할 수 없다. (본문 중)

오늘의 책을 리뷰한 '노래하는다롱이'님은?

책과 함께 하는 삶은 지루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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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는 아직도 여전히

 

사진 출처: 《박완서》 - 예술사 구술 총서

박완서는 아직도 여전히

수전 손택은 “작가란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세상에 바짝 붙어서 관심을 기울였던 작가 박완서의 4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그는 수전 손택이 말한 작가의 정신과 맞닿아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풀어낸 글은 세상의 한 시대라고 봐도 좋습니다. 해마다 1월 22일 즈음이면, 박완서를 추모하는 행사가 곳곳에서 열리고, 작가의 삶을 기리기 위한 책이 여럿 출간됩니다.

2015년의 신간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는 박완서의 맏딸 호원숙이 쓴 산문집입니다. 그녀는 엄마로서의 박완서를 글에 담았고, 친구처럼 대해줬던 엄마를 그리워합니다. 딸이 엄마를 썼다면, 다분히 이 책은 개인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이 책은 개인적인 것을 넘어 한국문학을 다시 비추기도 합니다. ‘글 쓰는 엄마’의 딸 호원숙은 엄마를 작가 박완서로 고쳐 보고, 그의 문학 앞에서 정중히 머리를 숙입니다.

나는 글쓰는 엄마를 외면했다. 도와줄 수도 없고 간섭할 수도 없는 엄마만의 일이었으므로. 그러나 엄마에게 가족의 일은 그렇지 않았다. 노망이 든 할머니와 늘 해왔던 아버지 수발과 해마다 돌아오는 아이들의 입시로부터 어머니는 놓여날 수가 없었다. 그 가족사를 회피하지 않으면서 결국에는 다 문학으로 풀어내셨다. 그 어떤 것도 외면하지 않고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다. (호원숙,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 달, 2015)

1977년부터 40여 년간 출간된 박완서의 산문집이 최근 재편집되어 총 7권의 산문집으로 나왔습니다. 작가는 한국 사회의 비틀어진 부분을 말할 때 더욱 냉철했습니다. 자신의 굴곡진 인생은 소설에 담아 작가가 스스로 움켜잡았다면, 산문에서 작가 박완서는 자신이 걱정하는 세상을 붙들고 놓지 않았습니다.

발전이란 게 계속 이런 속도로 질주만 하다간 이 아이가 주역이 될 21세기의 세상의 모습은 어떨는지, 무엇이 남아 있고 무엇이 없어졌을지, 그때도 사람에게 꿈이란 게 있을지, 그때 세상에도 사랑이란 말이 살아 있을지 그것조차 예측할 수 없다니 현재의 삶은 또 얼마나 황당한가. 그 황당함 때문에 더욱 큰 소리로 “사랑해”를 외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박완서, 《지금은 행복한 시간인가》, 문학동네, 2015)

2012년 1월 20일, 돌아가시기 이틀 전 작가 박완서가 남긴 일기에는 “살아나서 고맙다.”는 말이 쓰여 있습니다. 오늘, 작가 박완서의 4주기를 맞아 한국문학으로 살아 주셔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싶습니다. ‘가정이나 나라가 고난에 처했을 때 우리의 어머니나,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얼마나 아름답게 처신했던가는 상기해볼 만하다.’라고 한 산문에서 직접 말씀하셨듯 오늘은 당신을 절실히 상기해 봅니다.


연관 도서


| Editor_정혜원

hyewonjung@bn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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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샤오헝 《느리게 더 느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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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달리기가 가르쳐준 삶의 의미에 대해

 


무라카미 하루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문학사상 | 2009


책을 추천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독서를 워낙 즐기는 탓에 한꺼번에 여러 책이 아우성쳐서 골치가 아프다라고 말한다면 뻔한 거짓말이겠지만. 암튼 누군가가 공개적으로 추천한 책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내 경우엔 추천한 사람이 더 궁금해진다. 그래서 책을 추천한다는 건 어딘가 약간은 부끄럽고 겸연쩍은 일이 되어 버렸다. 이럴 때면 가급적 내가 하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보편적 성격의 책을 고른다. 아무래도 그런 편이 남 얘기 하듯 책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좋고 솔직하고 편하게 독자 입장에서 책에 대한 인상을 펼쳐놓을 수 있어서 좋다. 내겐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란 그런 책이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 않았다’라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책 말미에 써놓은 자신의 묘비명을 나도 달리기할 때마다 곱씹곤 한다. 그 말을 생각하며 달리면 희한하게도 어떡하든 계속 달리게 되고 지친 와중에도 기분이 상쾌해진다. 이 책을 읽고 이미 수많은 사람이 달리기를 즐기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니, 사실 들은 바는 없지만 그럴 것이라고 충분히 확신하게 된다. 책을 읽다가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 달리도록 만드니까. 스무 살 이후 동네 운동장 몇 바퀴도 뛰어본 적 없는 게으른 나 역시 달리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2009년 1월이었다. 무척 추웠던 휴일 아침, 아무도 없는 천변을 달리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 턱이 없던 나는, 달리기를 하면서 스스로 감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느낌은 거창하게 말하면 어떤 내면적 ‘만남’ 같은 것이었다. 그날 이후 달리기를 시작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갑자기 긴 거리를 달리게 된 것은 아니었다. 틈나는 대로 달리면서 점차 거리를 늘려나갔다. 몇 달이 지난 후엔 10킬로미터를 편하게 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엔 하프코스를 완주하게 되었다.

 

내가 하는 일은 건축설계다. 이 일로 말하자면 알려진 만큼 멋있거나 폼 잡는 일이 분명히 아니다. 대신 알려진 것 이상으로 고되고 에너지를 많이 필요로 하는 일임엔 틀림없다. 하루키가 달리기를 자신의 고된 글쓰기 인생을 지속하게 해주는 숭고한 정신적 ‘의식’으로 삼은 걸 보며 나 역시 달리기를 내 고된 직업을 계속 이어나가게 해주는 ‘의식’으로 삼고 싶었다. 그리고 그처럼 달리기를 하며 글을 쓰고 싶었다. 그렇게 흉내내다보니 일을 하면서 달리고 글도 조금씩 쓰는 삶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6년이 흘렀다. 여전히 건축설계를 하고 틈나면 달리기를 한다. 글을 쓰다 보니 책도 몇 권 펴냈다. 지금의 삶을 모두 달리기를 시작한 탓으로 전제 할 수는 없겠지만 서른아홉이었던 그 해 1월, 이 책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조금 궁금하긴 하다.

 

특별한 다짐을 위해 며칠간 하루 20킬로미터 이상을 걸었던 2010년 12월 겨울 지리산에서도 이 책은 나와 함께 있었다. 아테네의 폭염을 이기고 마라톤 풀코스를 처음 완주했던 대목을 읽으며 살을 에는 눈보라를 뚫고 산길을 걷는 내 상황이 재밌어 혼자 웃었던 기억이 난다. 트래킹을 마치고 민박집에 몸을 뉘여 책 몇 꼭지를 읽다보면 기다리고 있는 다음날 행군이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았다. 외려 마음이 훈훈해지면서 금새 잠이 들었다. 어디선가 훈풍이 불어오는 듯한 그의 후끈한 이야기가 지쳐있는 심신에 무척이나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하루키의 언어는 종종 소재로 삼는 이야기를 훌쩍 넘어서서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이야기 하곤 한다. 하루키의 그런 면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적잖은 공감과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리드미컬하게 팔과 다리가 움직이고 중력을 이기며 땅을 밀어내어 몸이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정신을 집중해서 알아간단 건 어떤 삶의 비밀 하나를 이해하는 것과도 같다. 5킬로미터든 10킬로미터든 21킬로미터든 한 발자국씩 달리고 나면 소진된 육체와 정확하게 반비례되는 정신적 충만함이 채워지는 것이다. 긴 거리를 천천히 달려간다는 행위가 신체단련의 차원을 넘어 자기수양의 도구가 된다. 책을 읽으면 누구라도 그런 도구가 하나쯤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 겨울의 한복판에서 다가오는 봄을 기다리며 책을 다시 펼친다. 봄을 기다리는 시점에서 새로운 내면의 다짐과 사색이 필요할 때 아주 제격이다. 엊그제도 호수 공원을 달렸다. 어느덧 이렇게 달린 지 6년이 되어가는구나 생각하면서. ‘젊은 날의 믹재거는 마흔다섯이 된 자신을 상상할 수 없었다’라는 책의 구절을 되뇐다. ‘누구든 나이를 먹으며 상상할 수 없었던 세계 속에 몸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 그 세계에 있는 것들을 받아들이면서 일단 살아가야 한다’고 하루키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나도 마흔다섯이다. 강물을 생각하며, 구름을 생각하며 그저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계속 달려온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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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과 서평을 나누고자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펜벗과 함께 만들어 갑니다.
펜벗이란 서평을 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매주 월요일, 성실한 서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 명예 펜벗 일문일답


 


최준석 | 건축가. 건축사사무소나우대표
건축사. 건축사사무소 NAAU를 운영하면서 주택, 어린이집, 기숙사, 기업사옥 등 다양한 건축설계를 진행 중. 서른여덟 살 때 집이나 글이나 ‘짓는’ 건 매한가지라는 소소한 깨달음을 얻은 후, 본업인 건축설계 틈틈이 글짓기에도 즐겁게 공을 들이고 있다. 건축은 ‘삶을 담는 그릇’이라는 정의를 여전히 신뢰하기에 겉모양이 현란한 외향적 건축보다는 삶을 위해 소소한 배경으로 존재하는 내성적 건축을 좋은 건축이라 믿는다.

첫 책 《어떤 건축》이 2010년, 두 번째 책 《서울의 건축》이 2012년, 그리고 작년에 《서울 건축 만담》이 나왔다. 주기상으로 보면 2년에 한 번 책을 내는 셈이다. 우연한 작업 결과인가. 모종의 ‘자신과의 약속’인가.


자신과의 약속까진 아니지만 첫 책을 내고 대략 2년마다 한 권씩 책을 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 했었다. 하지만 사무소 운영하면서 책을 쓴다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고 그렇게 하고 싶다고 될 일도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2년 주기로 책이 나오고 있는데 특별히 지키려고 애를 쓴 적은 없다. 우연히 그렇게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취미 이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정신적인 소모가 많은 일이다. 좋은 글에 대한 욕구가 클 때면 더 할 테다. 밥벌이를 위한 노동 이후, 시간을 쪼개 글을 쓰고 있다. 당신은 왜 글을 쓰려 하는가.


처음엔 글쓰기를 노동과 다른 종류의 일로 생각했다. 그렇다고 취미로 여기지도 않았다. 글쓰기를 통해 건축실무에서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표현하면서 스스로 위로받고 싶었던 것 같다. 쉽게 말하면 일종의 대리배설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글쓰기 자체를 통한 자기정화의 의미가 좀 더 큰 것 같다. 글을 쓰고 돈을 받는 일이 많아지면서 글쓰기가 점점 노동으로 느껴지고 있다는 게 조금 유감이다.

프로필 중, 집이나 글이나 ‘짓는’ 건 매한가지라는 표현을 했다. 좋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매칭이다. 지금껏 지은 3권의 책에 대한 리뷰를 한다면. 글이 원하는 설계대로 잘 지어졌는가.


‘짓는다’는 표현이 좋다. ‘만든다’는 그 자체로 완결의 의미가 있고 만드는 사람이 더 중요한 느낌이지만 ‘짓는다’의 의미는 밥이든 집이든 글이든 짓고 나서 그것을 먹고살고 읽는 사람까지를 포괄한다고 생각한다. 책들이 잘 지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건 독자들의 몫이 아닐까.

과거 어떤 책을 읽었고, 현재 어떤 책을 읽고 있는가. 분야든 상세한 제목이든 관계없다.

건축 관련 책부터 소설, 실용서 가리지 않고 보는 편이다. 한꺼번에 여러 권을 보는 스타일이라 일이 바빠지면 마무리가 잘 안 되는 문제가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세상물정의 사회학》과 《논어》다.

 

추천 책에 대한 한마디.

행동하게 하는 책들이다. 《빵굽는 타자기》를 읽고 무슨 글이든 써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여행의 기술》을 읽고서 생각만 하던 먼 여행을 실행했다. 《집을 생각한다》를 읽으면 내 가족을 위한 집을 짓고 싶어진다. 최근에 읽은 《건축과 감각》은 건축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

일반적인 서평이라기 보다, 주제를 정해 책을 고르고 글을 쓰는 작업이었다. 어땠는가. 독자들이 ‘겨울’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작성한 서평을 둘러보았다면,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개인적으로 겨울이라는 계절의 다면성을 좋아한다. 겉으론 추워서 움츠려있는 듯 보이지만 속에는 곧 다가올 봄을 기다리는 열망이 있다. 겨울은 다른 계절보다 사람마다 다양한 느낌으로 기억되고 표현되는 것 같다. 서평을 몇 개 읽으며 겨울이 새삼 참 복잡한 계절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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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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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t It Rock》 - 만화라고 우습게 보지 마라

 

 


 

남무성 | 《Paint It Rock》 | 북폴리오 | 2014


한국 어른들은 만화책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다른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아니면서 만화책은 그저 아이들이 심심풀이로 보는 ‘유치한 것’으로 꾸짖기 일쑤다. 정치적으로 유독 피곤한 시대를 살아 그런지 우리 부모 세대는 상대적으로 정상적인 문화생활을 누리지 못했고, 문화를 받아들이는 태도와 사고가 경직된 탓도 있다. 문제는 그다음 세대가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의 부모 세대 가치관을 그대로 물려받아 만화를 깎아내린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지의 슬픈 대물림이다. 8년 전, 붐비기로 악명 높은 도쿄 지하철 안에서 전과 크기만 한 소년챔프를 정독하는 정장 차림의 일본인 회사원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만화 보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여기는 한국 어른들은 나를 더 한심하게 만든다. 그 어렵다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칸트의 《비판》 시리즈, 《논어》와 《맹자》를 만화로 풀어내면 얼마나 이해하기가 쉬워지는지 모르는 것일까. 알면서도 천시하고 무시하는 건 알량한 지적 허영이자, 경험하지 않고 단정 짓는 편견과 선입견 이상 이하도 아닐 것이다.

북 치고 장구 치다

남무성의 《Paint It Rock》도 한국 ‘어른들’은 그저 코흘리개들이 좋아하고 환호하는 일개 만화책으로 여겼을지 모른다. 하지만 척 베리(Chuck Berry)부터 콜드플레이(Coldplay)까지 록의 60년 역사를 되돌아보는 이 책의 첫 권을 읽었거나 작가의 지난 작품 《Jazz It Up》을 읽어본 사람들은 그 비웃음들이 얼마만큼 어설프고 쓸데없는 것인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만화여서 쉽다는 게 얼마나 큰 장점이고 읽는 사람들에게 축복인지 저들은 아직 잘 모른다. 단지 그 만화를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만 남을 뿐이다.

《Paint It Rock》이 좋은 건 글과 그림을 모두 음악평론가인 작가가 직접 쓰고 그렸기 때문이다. 이는 언뜻 가벼운 우연처럼 보여도 매우 중요한 사실인데, 한 장르의 통사를 살피는 과정에서 개인 사유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집필을 위한 자료 찾기와 정리는 누군가 도와줄 수 있겠지만, 생각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고 능력이므로 남이 해줄 수 없다. 생각한 이가 스스로 표현했을 때 더 논리적이고 설득력을 띠게 되는 건 당연한 일. 그런 면에서 남무성은 남들은 하나도 갖기 힘든 글과 그림이라는 두 재능을 모두 가졌고, 록 역사에 그것을 아주 잘 발휘해 내었다.

웃기니까 만화다?

이 책은 일단 웃기다. 무릇 역사란 어느 장르건 진지한 법인데 이 책은 진지함을 유머로 부드럽게 만든다. 다루는 내용은 의도한 과장과 개그 코드를 빼면 모두 사실(Fact)이어서 웃으면서 록의 지식을 하나하나 자신의 머릿속에 쟁여나갈 수 있다. 바로 여기에 만화책의 힘이 있는 것이다. 물론 《Paint It Rock》은 어쩌면 만화책을 가장한 ‘진짜’ 록 역사책일지도 모른다. 작가도 충분히 의식한 듯 “만화책에 글이 왜 이렇게 많으냐”며 “해골 아픈 이야기들”을 원망하는 독자들을 가정한 걸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이 책은 만화책이라고 쉽게 덤벼들었다가 낭패를 볼 만큼 ‘글’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수많은 밴드와 뮤지션들이 얽힌 관계, 각종 상황을 한 자리에서 풀어내야 하니 어찌 그림으로만 가능했겠는가. 쥘 베른의 책에서 독자의 숨돌림을 도운 게 삽화라면, 남무성의 책에선 글이 그 역할을 했다.

듣기의 미덕

그림도 많고 글도 많아서 이 3부작을 읽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독자의 시간을 위협할 요소가 바로 음악이다. 작가도 책 속에 언급해두었듯 이 책은 록에 관한 이야기다. 당연히 음악이 먼저고, 이야기는 그 배경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유일한 약점이랄까. 그것은 “자우지장, 두다다다”의 의성어로만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책이라는 매체의 한계와도 직결된다. 책이 다룬 뮤지션들의 대표곡이 담긴 컴필레이션 CD를 한 장씩 부록으로 붙여도 될 법했건만, 역시나 저작권 문제라는 큰 장벽 때문에 포기해야 했으리라. 이 난관은 독자 스스로 헤쳐나가야 한다. 방법은 하나, 책에서 언급한 앨범과 곡들을 직접 찾아 듣는 것이다. 요즘 같이 좋은 세상은 이럴 때 활용하라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CD를 구하기 힘들면 음원 사이트로 가면 되고 거기에도 없으면 유튜브라는 괴물에게 도움을 청하면 된다. 필자도 해봤는데 웬만한 앨범과 곡은 다 찾아 들을 수 있다. 작가가 이 책을 집필한 취지도 좋은 록 음악들을 함께 듣자는 데 있는 만큼 듣기는 《Paint It Rock》을 완전히 소화하기 위한, 어쩌면 읽기보다 더 본질적인 행위일지 모른다.

입문자용이 아니다

에필로그에서 남무성은 이 책이 “어린 음악 팬들에게는 정보를 주고 나와 동시대를 살았던 중년들에게는 향수를 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이 책이 입문자용이면서 입문자용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이다. 꾸준히 록 음악을 찾아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좀 가벼울 수 있는 반면, 록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버거운 내용일 수도 있겠다. 우선 등장하는 뮤지션들 수가 엄청나고 그에 따른 앨범과 곡 수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래서 처음에 겨냥했던 독자층(=록 입문자)이 이 책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선 록에 관해 좀 더 아는 사람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할 것이다. 뮤지션 이름도 외워야 하고 그들의 관계도 파악해야 하고 앨범도 찾아야 하고 곡도 찾아야 한다. 찾으면 또 들어야 한다. 그나마 얼터너티브 록은 짧고 명쾌하지만 프로그레시브와 아트록 쪽으로 가면 듣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다. 브릿팝은 감미롭지만 헤비메탈이 만만치 않은 것 역시 기나긴 아트록 러닝타임의 압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은 단순한 입문자용이 아니다. 록에 관심이 있고 록을 사랑하는 사람 또는 앞으로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아는 만큼 섭취하고 즐길 수 있는, 굳이 따지자면 ‘중급’ 정도 수준의 서양 록 통사라면 맞겠다. 뉴메탈이 빠진 것에 일부 사람들이 아쉬움을 느끼는데, 저자의 주관이다. 주관이 배제된 저작은 있을 수 없다. 매체가 가진 오래된 특징, 관행을 본다면 그리 큰 오점이라고는 볼 수 없다. 물론 콘과 시스템 오브 어 다운까지 나왔다면 더 재미있었겠지만 그에 비길 만한 재미와 감동이 《Paint It Rock》에 있으므로 더 이상 트집거리는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삼국지》를 다시 읽는 기분이었다. 요코야마는 따분한 이문열의 《삼국지》를 내 기억에서 밀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남무성도 마찬가지다. 록에 취하고 싶은 자들은 이 책을 집어라.

 

오늘의 책을 리뷰한 '돗포'님은?

버트란드 러셀을 좋아하고 도스토예프스키에 빠져 있으며, 록앤롤/ 재즈/ 블루스를 닥치는대로 섭취중인 30대 '음악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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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를 그만두다》 - 왜 사는데


 

 


히라카와 가쓰미 | 《소비를 그만두다》 | 더숲 | 2015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는 참으로 많고 첨예하다. 2015년 1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갑과 을의 논쟁, 그리고 폭력이다. 어린이집 아이를 학대한 보육교사, 땅콩회항으로 불붙은 을을 향한 갑의 횡포. 물론 이 말고도 한둘이 아니지만 거의 모든 현안이 덮일 만큼 크게 동요하고 있다. 이 문제들을 살펴보면 단순한 폭력의 문제는 아니다. 유아 학대를 보면 맞벌이 때문에 아이를 맞길 수밖에 없는 가정, 보육교사의 과도한 노동환경, 어린이집 운영에 관한 비리가 얽혀있고 갑, 을 문제 또한 노동과 돈에 대한 문제가 얽혀있다. 이는 비단 어린이집에 CCTV 하나 설치한다고, 가진 자들이 친절함을 장착한다고 해서 해결될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돌아가 보면 '돈', 자본으로 귀결된다. 그럼 돈 문제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돈이 신앙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살게 되었는가. 왜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자신들을 위한 법률을 만들고 해석하는 동안 그렇지 못한 자는 늘 박탈감에 시달리고 일자리를 걱정해야 하는가. 많이 '소비'하는 것을 미덕이라 여기며, 더 많이 소비할 능력이 있는 자들을 칭송하고 동경하며 떠받드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가. 저자는 이런 우리와 다르지 않은 금전 만능주의의 사회, 자국 일본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있다. 물론 이 책이 이러한 거대한 담론을 이야기하는 책은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제 더는 생산의 주체가 아닌 '소비'의 주체가 되어버린 '개인'의 모습을 돌아보며, 소비를 위해 살아가는 일본 사회에 그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도 참 비슷하게 변하고 있다. 가족중심의 사회에서 서구사회처럼 '개인'을 중시하는 사회로 바뀌었고, 기업들은 '시장창조'라는 이름으로 지역과 가정을 잘게 쪼개 개인을 만들고 개인의 욕망을 환기해 '소비자'를 만들었다. (89쪽)


 

이를 미개 시장으로 확대한 것이 바로 '세계화'다. 우리는 '소비'의 주체가 되어 기업들이 환기한 욕망을 따라 '소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대형 상점이 들어서 지역 경제 기반이 흔들리고 이를 따라 형성된 시민들의 긴밀한 관계 역시 파괴된다. 우리는 철저하게 노동과 생산이 분리되어 그들을 위해 일하고, 또 소비한다.

 

이를 해결할 방법으로 저자는 소비자에서 생산자가 되자고 말한다. 창업이 아닌 '소 상업', 돈벌이가 아닌 '살아가기'가 중심이 된 '탈소비자'를 생각하자고 한다. 싸게 사는 것이 아닌 비싸도 가치 있는 소비를 하는 것, 적게 벌되 잘 순환시키는 것, 상품 경제 속에 '증여'와 '교환'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경제성장을 하지 않는 사회'로 재설계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말한다.

이 책은 오로지 소비 그 자체에만 초점이 맞춰있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강요된 욕망만을 좇아 사는 우리 모습에 좋은 충고를 들려준다. 그러나 아쉬운 부분은 이 모든 것들을 조금 두루 뭉실하게 제시한다는 것이다. 책의 3분의 1 정도는 일반적인 자기계발서에서 보이는 경험담이 대부분이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수필이나 새로운 대안을 제안한 입문서 정도로 본다면 꽤 괜찮을 책이고, 만일 그전에 이와 관련된 책을 읽었거나 자주 접해 보았던 사람이라면 조금 아쉬울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락아프리카'님은?

밴드 아프리카의 보컬리스트입니다. 역사(고대사)와 미스터리, 추리, 스릴러 소설 분야의 책을 좋아합니다. 우리 부부를 선택하여 함께 살게 된 사연 많은 길고양이 4마리와 정도사라 불리는 드러머 남편과 유유자적, 대책 없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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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릅나무 아래 욕망》 - 원하고 욕망하죠

 

 



유진 오닐 | 《느릅나무 아래 욕망》 | 열린책들 | 2011


 

지하철을 탈 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그늘이 져 있다. 처음에는 피곤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루를 열심히 일했으니 퇴근길의 얼굴이 어두운 것이고 다음날 출근길 얼굴이 어두운 것도 피로가 덜 풀려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가만히 보니 낮에도 객실 안의 사람들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안에서는 어두운 얼굴도 지하철 밖에서 봤을 때는 그늘이 없다. 낮에는 활기가 넘쳐야 하니 피로와는 상관없을 텐데 낮에도 얼굴이 어둡다는 것은 피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전철을 벗어나 밝은 길거리에서 보면 얼굴이 어둡지 않다는 것도 피로가 원인은 아닐 것이다.

조명 때문이었다. 지하철 객차의 불빛은 사람 머리 뒤에서 아래로 내리쬔다. 빛이 닿지 않는 얼굴 면에는 그늘이 지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빛을 많이 사용해서 사방을 밝게 한다면 얼굴에 그늘이 지지 않겠지만, 천장 가운데에 매달린 형광등 하나로만 객차의 밝기를 결정하니 빛이 제대로 닿지 않는 곳이 생기고 얼굴에 그늘이 서린다.

지하철 창문을 바라보면 내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어둡다. 뭉크의 그림 속 얼굴처럼 얼굴은 늘어져 있고 우울한 기운이 가득하다. 그런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니 마누라의 뽀뽀를 받으며 출근한들 지하철만 타고 나면 기분이 찌뿌둥한 것이다. 지하철의 조명은 하루에 영향을 미친다.

사람은 머리 위에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무엇이 되었든 힘이 세든 약하든, 좋든 나쁘든, 어둡든 밝든 힘 아래에 있기 시작한 때부터 힘의 영향을 받는다.

《느릅나무 아래 욕망》에서 등장인물 각자에게 영향을 준 것은 욕망과 어머니였다. 아버지인 이프리엄 캐벗은 탐욕 아래에서 무자비하게 재산을 넓혔고 아이들을 막 대했다. 둘째와 셋째 아들인 시미언과 피터는 욕망이 컸기에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늘 말하고 다녔다. 막내아들 에벤은 죽은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복수한다며 아버지의 새 부인인 애비 퍼트넘과 관계를 맺었다. 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낳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아버지를 욕보여서 어머니의 복수하려는 것이었기에 아이를 낳은 뒤에도 애비 퍼트넘에게 사랑한다 속삭였다. 그는 아버지의 침상을 끊임없이 더럽혔다. 애비 퍼트넘은 농장을 갖겠다는 욕망으로 결혼을 했다. 에벤에게 성적인 욕망을 느껴 에벤을 유혹했지만 에벤이 다가오지 않아 힘들어했다. 그러다 에벤이 자기에게 오지 않는 이유가 에벤에게 깊게 영향을 끼친 엄마의 그림자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그녀는 그림자를 걷어 내고 싶어 했다.

한 가족의 집에 애증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와 탐욕에 가득 찬 손아귀가 가득했다. 분노로 핏대 선 목에서는 쉬지 않고 고성이 뿜어져 나왔다. 근친상간이 끊이지 않았고 유아살해가 일어났다. 그 집 앞에는 느릅나무가 가지를 길게 뻗고 우뚝 서 있었다.

어쩌면 느릅나무를 찍어냈더라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느릅나무 가지가 집 위에 길게 늘어져서 햇빛을 막았다면 지하실처럼 집은 퀘퀘했을 것이다. 항상 어둡고 습기 찬 집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테니 가족들의 성격도 음울해졌을 터. 느릅나무 주위에서 생긴 벌레가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많은 벌레는 집 안까지 들어왔을 것이고 잠자리를 방해하고 일상을 괴롭혔을 것이다. 집이 안식의 공간이 되지 못하니 사랑의 말은 할 수 없고 증오의 말만 내뱉는 것이다.

책에는 느릅나무에 대한 언급이 두어 번 정도 나온다. 느릅나무가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실제 느릅나무는 높이가 20~30미터나 되는 큰 나무라고 한다. 그것을 생각해 보자면 아마 유진 오닐은 느릅나무가 있는 집을 통해 부를 이룬 미국인 가정을 상징하려고 했던 것 같다. 큰 나무가 흡사 큰 재산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느릅나무는 축축한 습기가 있는 산골짜기에서 잘 자란다. 유진 오닐은 큰 부를 이룬 가정이지만 그 가정은 따뜻하지 않고 축축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수많은 나무 중에서도 느릅나무를 들었는지도 모른다. 큰 부를 이루어서 행복한 것 같지만 그 큰 부 아래에선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아들은 아버지를 떠났지만, 한편으로는 느릅나무를 떠난 것이다.

유진 오닐이 《느릅나무 아래 욕망》이라는 희곡을 썼을 때 느릅나무는 지극히 상징적이었을 것이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으며 옆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이 뭉크의 그림 속 절규하는 사람과 똑같은 것을 목도한 지금, 느릅나무는 상징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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