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크프리트 렌츠 | 《유랑극단》 | 사계절 | 2012
언젠가 하루 종일 극장에서 영화 4편을 본 적이 있다. 무언가를 -‘완전히’가 아닌 ‘순간적’으로라도- 잊고 싶었기에 선택한 것이었다. 영화 한 편이 끝나고 앞쪽 퇴장로가 아닌 뒷문으로 나가서 다음 영화의 상영관으로 들어가고, 영화가 끝나면 다시 또 뒷문으로 나가서 다음 영화의 상영관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아침에 일찍 들어갔던 극장에서 4편의 영화를 모두 다 보고 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진 저녁이었다. 생각해보니 한 끼도 먹지 않고 그렇게 내리 영화 4편을 본 것이다. 집중해서 본다고 봤는데 영화가 다 끝나고 나왔을 때는 각각의 내용이 자세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눈은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머릿속은 잊고 싶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고 있었나 보다. 그렇게 하루가 다 끝날 때쯤에야 나는 그 시간을 잊고 싶다는 바람으로 바보 같은 하루를 보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자려고 누워서 생각해보니 모든 것은 원점이었다. 나는 영화를 본 것도 아니고, 잊고 싶었던 일을 잊은 것도 아니며, 피하고 싶었던 일들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내가 부딪혀야 할 현실은 여전히 내 몫으로 그 자리 그대로 남아있었다.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여전히 함께 해야 할 일상과 삶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견뎌내야만 했던, 내가 감당해야만 하는 그 삶.
클레멘스와 하네스, 두 남자와 죄수들의 일탈은 나에게 그날의 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일탈은 영원한 게 아니라 일탈이 끝나면 다시 현실을 만나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감옥에서 같은 감방을 사용하게 된 두 사람은 어느 날 몇 명의 죄수들과 함께 그곳으로 공연온 유랑극단의 차를 훔쳐 달아난다. 그렇게 그들이 도주하다가 도착한 곳은 어느 소도시 그뤼나우. 그뤼나우의 패랭이꽃 축제가 한창이던 분위기에서 사람들은 유랑극단의 버스와 그 차에 타고 있던 죄수들을 유랑극단의 단원들로 착각한다. 죄수들은 당황하지만, 사기꾼 하네스가 기지를 발휘하면서 매 순간 잘 넘어가게 된다.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그만큼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죄수 신분이었고, 쫓기는 신세였으며, 그들이 돌아가야 할 자리는 변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옥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들을 피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젠뷔텔의 죄수들처럼 과감하게 감옥 밖으로 탈출을 시도하거나, 잠시라도 잊고 싶어 미친 듯 술을 마시거나, 어떻게 해서든 그 순간의 시간들을 보내려 애를 쓰는 방법들이 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실존하는 감옥(피하고 싶은 현실)은 우리의 눈앞에 그대로, 당당하게 버티고 서서 있기 마련이다. 잠시 회피했다고, 눈을 감았다고 해서 사라지거나 잊힌 게 아니다. 견뎌야 할 그 삶은 그저 잠시 동안의 일탈을 눈감아 주며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여전히 우리가 부딪혀야 할 현실 속의 모습 그대로인 채로 말이다.
나를 포함한 보통의 사람들은 견뎌내야만 하는 그 시간들을 우울과 함께 보내기 쉽다. 감옥이라고까지 부를 수 있는 어려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그리 유쾌할 리 없다. 우울하고 괴롭고 고통스럽다. 꼼수를 써서라도 피해가고 싶은 순간들의 연속일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런 현실의 감옥을 탈출하는 이들의 모습을 참으로 엉뚱하고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들이 탈출하는 행위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시도로 보였는데 그걸 가능한 일로 만들었고, 그뤼나우에서는 예술가로서 살아가며 그 잠깐의 순간을 즐기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그들의 현실은 그게 아닌데 그들이 보내고 있는 시간이 현실로 받아들여질 만큼, 그들 자신이 진짜 배우이고 합창단원이 된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그들이 죄수이고 감옥을 탈출한 상태라는 것을 완전히 잊은 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들이 탈출해서 보낸 그 시간들은 실제일까 상상일까? 만약 상상이라면, 한번쯤 그런 판타지를 꿈꾸는 것도 남겨진 시간들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다음 장소로의 이동과 뒤쫓는 감시에로부터의 탈피는 실패로 끝났지만, 바깥세상으로의 잠깐 동안의 일탈의 기억은 어쩌면 감옥에 남아있는 그들의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요소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바깥세상의 많은 것들을 다시 만나고 즐기고 싶은 바람은 변함이 없을 테고, 그들에게 남겨진 그 시간을 견뎌내야만 다시 그곳으로 갈 수 있으니 말이다.
모든 일이 순리대로 흘러가듯 높은 담장 안의 감옥으로 되돌아온 그들은, 그들이 저질렀던 일탈의 결과물을 두 눈으로 지켜보게 된다. 다시 맞닥뜨린 현실을 감당하지 못해 마지막을 선택한 사람, 이번에는 완벽하게 해내겠다는 다짐으로 다시 탈출을 계획하는 사람, 그리고 눈앞의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사람. 어떤 선택이 각자에게 가장 현명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신이 선택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확실히 모른다. 하지만 그들(우리)은 그 순간 생각을 해야만 했고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해야 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 선택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는 시간을 다시 만나게 된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자유를 경험했고, 자신들의 내면에 있는 줄도 몰랐던 예술에 대한 가능성도 발견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감옥 안에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그들에게 닥친 현실을 직시하고 누군가와 함께 견뎌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 들어오게 된 감옥, 자유로웠을 때는 그 가치를 미처 알지 못했던 자유, 그리고 이제 다시 그 자유를 찾아 나갈 수 있는 순간에 대한 기대로 묵묵히 견디는 것뿐이다. 클레멘스와 하네스가 선택한 것은 그것이다. 그 감옥 안에 남아서 견디는 것, 그게 그들이 감당해야 할 현실이고 그것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누군가와 함께라면 견디는 일에 조금 더 힘이 생기고 의지와 위로가 될 것이다. 그런 마음을 저자는 하네스의 마지막 선택으로 잘 보여주는데, 기가 막히게, 이번에는 완벽하게 탈출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웠음에도 하네스가 플레멘스와 함께 감옥 안에 남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기왕 견뎌야 하는 시간이라면, 견뎌야 하는 게 그 삶의 선택이라면 적어도 자신의 슬픔을 공유할 수 있는 누군가와 함께 하며 따스한 위안을 받는 것. 그렇게라도 견뎌진다면 살아가는 순간들이 조금은 즐거울 수도 있지 않겠냐고.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 도움이 될 리 없다. 피하고 싶은 것은 그것을 완전하게 해결하기 전까지 계속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라면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야기다. 혼자가 아닌 그 누군가와 견딘다는 것은 상당히 큰 위로와 용기로 다가오기 마련이니까. 우리가 힘든 일 앞에서 가까운 친구나 가족을 떠올리고 그들에게 도움 받거나 기댈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처럼, 그 마음을 하네스와 클레멘스를 통해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조금은 더 따스해지고 포근해진 마음으로 그 순간을 견딜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희망을 품고서.
“여러 번 생각했소. 견뎌 내는 것에 대해서.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견뎌 내야 해요.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자신에게 닥치는 것, 사람들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견뎌 내야 해요. 가끔은 타인도 견뎌 내야 하는 법이죠. 그런 점에서 당신은 함께 지내가가 한결 쉬웠소. 모든 면에서.” (127쪽)
유랑극단이 공연하는 <미로>라는 작품을 통해 나는, 그 미로 안으로 죄수들이 들어가는 것을 상상했었다. 미로를 통해 사라지는 죄수들, 그리고 그 미로를 통과한 죄수들이 만나는 자유로운 세상. 완전범죄를 꿈꾸는 범인처럼 죄수들에게 그런 판타지를 선물하려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흐름은 그들에게 판타지를 허용해 주되, 현실을 버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삶이 진행되고 있는 현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충고처럼, 우리 눈앞에 실존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감옥은 버릴 수도, 피할 수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렇게 피하고 싶어도 피해질 수 없다면 받아들이고 견디는 것으로 현실을 마주하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오늘의 책을 리뷰한 ‘캔맥주’님은?
책으로 위로 받는 그 순간을 사랑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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