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이르는 명사로 “○○ 없기는.”과 같은 형태로 쓰이곤 합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예문 때문에 다들 눈치 채셨을 텐데요. 바로 교양(敎養)입니다. 언젠가부터 상식만큼이나 강조되고 있지요. 유행어는 대중이 주목하는, 혹은 요구하는 인간상을 반영합니다. 교양은 후자에 가깝겠지요. 말인즉슨 교양을 갖춘 인간이 현 시대에 그리 많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교양은 뭐 아무나 하나? 음악회나 미술관 다니고 차도 좀 마시고 하려면 다 돈이 있어야지. 일리 있는 말입니다만, 교양을 습득하는 데 들인 돈과 그 실천적 능력이 꼭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귀부인 응접실’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귀부인 응접실’로 전락한 교양은 ‘너 얼마나 알아?’라고 묻습니다. 마치 돈이 얼마나 있느냐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교양은 ‘왜 알아야 해?’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분야를 막론하고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들이 모여 사는 시대에 이보다 더 마땅한 이유가 있나요? 그리하여 저희도 좀 보탬이 되어 보려고 합니다. 매주 수요일 오후 4시 YTN 사이언스 채널의 뉴스 한 꼭지인 ‘사이언스 북 카페’를 통해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었어요. 관련 내용 및 링크는 반디앤루니스 공식 블로그(를 비롯한 분점)에 정기적으로 게재할 예정입니다. 교양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교양과학, 그리고 미모의 에디터 현선님이 준비한 책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본방 사수! 반디앤루니스와 함께 보다 나은 인간으로 향하는 공부를 시작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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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희진

 

지난 6월 15일 저녁, 과중한 업무들을 해치우자마자 발걸음을 서둘렀습니다. 누굴 좀 만나기로 했거든요. 헐레벌떡 도착한 약속장소 마포아트센터는 똑같은 책을 손에 든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우리만의 약속이 아닌 줄은 애초에 알았지만 이 정도 인기인(!)이었다니. 다른 사람들에 질세라 우리는 자리를 잡고 만인의 연인인 그 분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 분은 이윽고 무대로 걸어 나왔습니다. 아, 이제는 정확히 알려드릴게요. 바로 신영복 선생님입니다.

 

신영복

 

 

194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숙명여대 정경대 경제학과 강사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 20일을 복역했다. 1988년 8월 15일 특별가석방되었으며, 그 후 성공회신학대학에서 경제학 및 한국사상사를 강의했다. 2006년 말에 정년퇴임했고, 퇴임당시 소주 포장에 들어가는 붓글씨를 그려주고 받은 1억원을 모두 성공회대학교에 기부하였다. 현재는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신영복과 함께 읽기’라는 수업을 통해 학생들과 나눔과 소통을 하고 있다.

 

지은책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 《엽서》(1993), 《나무야 나무야》(1996), 《더불어 숲 1, 2》(1998),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20004)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외국무역과 국민경제》(1966), 《사람아 아! 사람아》(1991), 《노신전》(1992, 공역), 《중국역대시가선집》(1994, 공역) 등이 있다.

 

 

 

이날 북콘서트는 《변방을 찾아서》 출간을 축하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열혈 독자뿐만 아니라 사회를 맡은 고민정 아나운서, 도종환 의원, 김진업·박경태·김창남 교수가 활동하는 밴드 더숲트리오, 뮤지션 시와가 그 시간을 함께해주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두루두루 모여든 것을 보며 세상 모든 변방의 연대를 그려 보았습니다. 또한,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들의 역할과 자각이 중요함을 다시금 실감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강연에 이어 진행된 대담과 공연, 그 뜨거운 현장을 공개합니다.

 

 

강연 엿보기

 

 

중심부에 들어가면 다른 생각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넓은 광야로, 벌판으로, 변방으로 가야 합니다. 길을 가는 자, 흥하리라. 성을 쌓는 자, 망하리라. 변방은 대단히 좋지만, 변방이 창조적일 수 있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전제가 필요합니다. 바로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멕시코의 청년들은 모국이 낳은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를 무척 높이 평가해요. 멕시코는 우리나라보다 못 살지만 자기 나라에 굉장히 자부심이 있어요. 피카소에게 콤플렉스 가지지 않은 미술가. 피카소와 결별하고 거실에서 광장으로 그림을 갖고 나온 사람. 그 사람들 문화의 기본적인 코드가 ‘아버지 죽이기’에요. 유럽으로부터 미련 없이 결별하는 것. 남미에서 많은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입니다. 변방의 창조성. 중요한 것은 중심부의 논리와 담론에 갇혀 있는 우리들의 생각을 깨뜨리는 겁니다. 철학은 망치로 하는 것이다!

 

여러분과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말이 ‘야심성유희’입니다. 밤이 깊으면 별은 더욱 빛난다. 한낮에 훨씬 더 분명하게 사물을 바라볼 것 같지만, 해가 지고 어둠이 깔려야 몇억광년 너머의 별들이 빛나기 시작합니다. 변방이 그런 것이죠. 시간과 공간, 우리 사회가 이 담론을 어떻게 재구성해야 할까. 여러분들이 한 번쯤 고민해주시길 바랍니다.

 

 

대담·공연 엿보기

 

 

신영복 | 변방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성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중심부 내에서도 변방이 있을 수 있고, 변방에서도 중심이 있을 수 있다고 봐요. 그래서 변방이라는 것은 특정한 카테고리를 의미한다기보다는 현재 상황을 넘어서려는 새로운 지향성을 갖는 그런 관점을 변방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변방에 대한 다이나믹한 적극적 의미를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변방에 있다는 사실이 결코 주변부나 사회적 약자로 직결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변방은 굉장히 자유롭고 새로운 것이 창조되는 곳. 역사적으로도 그랬어요. 변방이라는 것은 자기의어떤 처지를 뛰어넘어 보다 먼 미래, 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을 이끌고 나가는 공간이 변방입니다.

 

 

 

도종환 | 저는 태어난 곳, 살아온 곳, 작품을 써온 곳이 모두 변방이었습니다. 비주류죠. 이제 중심에 온 지 한 10일 됐어요. (웃음) 그런데 그 자리에 같이 있는 분들이 제가 중심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 속에서도 비주류이고 변방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요. 노무현 대통령이 그 자리에 있어도 주류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이렇듯 변방이고 비주류지만, 주류 가치를 만들어나갈 수 있기 때문에 변방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공간, 그런 사람이라는 점에서 변방은 참 중요합니다.

 

 

 

더숲트리오 | 연구를 하다 보면 우리 사회의 변방에 있는 사람들을 늘 만납니다. 학문의 대상으로 만난 분들이지만 이렇게 아픈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변방이라는 건 그때그때 달라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변적이죠. 그러니까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또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거죠. 주류가 저절로 변하지는 않습니다. 변방이 각성하면서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죠. 역사라는 게 그런 식으로 변해왔다고 선생님께서는 늘 말씀하셨는데요. 변화하는 변방, 그 변방의 변화를 통해서 함께 변하는 방향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주인이니까 우리가 변해야 하는 거죠.

 

 

 

시와 | 저는 지난주에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읽었는데요. 제일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었어요. 마음에 남는 이 구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서예의 덕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서여야라는 근원이 있다. 무릇 글씨는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같다는 것은 물론 글씨의 형식과 내용이 같아야 한다는 뜻이지만 그러한 형식과 내용의 조화뿐만 아니라 서예란 다른 모든 예술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고민을 담아야 하고, 그 글씨를 쓴 사람이 그 속에 담겨야 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옳다.” 저는 이 문장의 글씨라는 자리에 제가 부르는 노래를 넣어 봤어요. 그래서 제가 부르는 노래와 노래를 부르며 활동하는 자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헌정하는 노래를 부르는 시와는 아름다웠습니다. 더숲트리오와 합주한 노래를 끝으로 시와가 퇴장한 후, 바통을 이어 받은 더숲트리오는 밤샘 공연까지 불사할 기세로 멋진 무대를 보여주었습니다. 세시봉 공연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는데요. 비록 그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지는 못하지만, 신영복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변방을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함께 기억할 수 있겠습니다. 구전될수록 오래 기억되는 것이 노래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변방의 가치를 소문낼 차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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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민 |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 위즈덤하우스 | 2012

 

 

마르크스가 활동한 시기는 1800년대 중?후반이지만 정작 우리가 아무런 재제 없이, 자유로이 그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군사정권 시대는 두 말할 것도 없고, '보통사람'의 시대인 1990년도만 해도 《자본론》 제1권(만)을 출간한 출판사 대표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고 하니, 마르크스는 그 당시에도 여전히 특별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후 김수행 교수 번역의 《자본론》이 제3권까지 완결된 시기가 2004년 즈음이고(1권의 출간은 훨씬 이른 시기였지만), 2006년에는 고등학생들의 논술 학습서에까지 《자본론》이 등장한 것을 보면 대략 10여 년 전쯤부터 마르크스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힘겹게 이뤄진 마르크스와의 상봉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거리감은 여전히 존재했다. 경제위기의 여파로 대부분의 관심은 마르크스를 통해 어떻게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는가에 있었고, 많은 지식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마르크스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며 글을 맺곤 했지만 정작 하루의 끼니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저 멀리서 들려오는 관념의 메아리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는 마르크스라는 위대한 학자와 불후의 명저 《자본론》을 조금은 멀찌감치 밀어 놓는다. 그 대신 마르크스의 청년시절로 돌아가 그의 휴머니스트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경제학 철학 초고>와 유물론에 열광했던 시절 쓴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의 문장들을 발췌하고 <헤겔 법철학 비판>, <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고타강령비판>을 비롯 엥겔스와 공저한 <독일 이데올로기>나 <신성가족> 등 (대중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저서들마저 불러내 마르크스가 가지고 있던 다양한 생각들을 보여준다. 물론 그의 대표작인 《자본론》을 제외시킨 것은 아니지만 개인으로부터 시작해 경제, 정치를 포함한 사회, 그리고 역사에 이르렀다가 다시 개인으로 수렴되는 사유의 과정 속에서 《자본론》이 차지하는 부분은 의외로 적은 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통해 마르크스로 접근했던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 그의 인간애를 출발점으로 접근해 간다면 실존과 현실에 대한 우리들의 고민에 색다른 조언들이 들려올 것이다.

 

마르크스가 바라 본 인간이란 독립된 개별적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데카르트의 입장에서는 이의를 제기할만한 정의(definition)겠지만 마르크스는 '생각' 또한 관계로부터 유입되는 바, 사회 속에서 관계 맺지 않는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가 '소외'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소외가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인데, 여기서 소외란 단지 타인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외톨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적(類的) 존재'로서의 인간이 겪는 노동으로부터의 소외, 더 나아가 자연으로부터의 소외까지 이어지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인간적 본질은 각각의 개인들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ensemble이다.(33쪽)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자신의 몸도, 그의 바깥에 존재하는 자연도, 그의 정신적 본질, 그의 인간적 본질도 소외시킨다. 자신들의 노동생산물, 자신들의 생활 활동, 자신들의 유적 본질로부터 인간이 소외되었다는 사실로부터 나오는 귀결은 인간의 다른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다. 각각의 인간은 다른 인간들로부터 소외되고, 모두는 인간의 본질적 자연으로부터 소외된다.(52쪽)

 

인간을 무리 속에 살아가는 유적 존재로 보고 인간의 유적 본질을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으로 여겼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노동의 소외를 초래한다고 생각했다. 노동의 소외란 쉽게 말해 노동의 수확과 실행과정에서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감정상태를 의미하는데, 자본주의의 사유재산제도 하에서는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에게 모든 노동의 결과물이 종속되므로 노동자는 이것을 직접 소유?처분할 권리를 박탈 당하고 더 나아가 노동은 무의미한 반복 행위로 전락하고 만다. 또한 마르크스의 ‘노동’을 《자본론》에서의 의미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그의 철학적 사유 전반을 통해 지적, 육체적 활동으로 간주할 때, 이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많은 직장인들이 토로하는 ‘지겨운 밥벌이’와 일맥상통하며, 그 ‘지겨운 밥벌이’가 우리의 삶, 우리의 사고방식까지 규정하는 ‘생산양식’임을 밝힌 마르크스를 통해 현실을 각성하는 계기가 된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물질적 생활은 물론 사유 방식에 있어서도 독립적인 인격체가 되길 바랬다. 그래서 차안(this world)보다는 피안(that world)을 바라보고 현실의 고통을 신(神)에게 의탁하게 하는 종교와 주객이 전도되는 결과를 빚어내는 물신성(fetishism)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여기서 물신성이란 사전적 의미를 너머 인간의 사고로 어떤 대상을 신격화하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임을 망각한 채 이에 지배당하는 현상을 의미하는데, 종교 역시 무신론자인 마르크스의 입장에서는 물신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물신의 문제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소외시키는 ‘세속적’ 방식을 교묘하게 은폐하는데 있다(비록 종교의 경우 자기소외의 ‘신성한’ 형태라고 별도로 칭했지만).

 

어떤 사람이 왕인 것은 오직 다른 사람들이 그를 받들어 신하로서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대로 그가 왕이기 때문에 자기들은 신하라고 생각한다.(67쪽)

 

저자는 물신의 지배 ‘아래’서 주술에 걸린 듯 일하고, 소비하고, 사고하는 우리들을 마르크스의 이론에 태워 ‘위’쪽으로 끌어올리고 마치 조감도를 보듯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물신의 지배 영역에서 벗어난 우리들은 끊임없이 경쟁에 허덕이는 자본가들을 내려다 보고, 소비자로서의 갈등을 겪는 노동자의 마음을 엿보며, 사회가 법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회에 기초하는 원리를 알게 되고,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가의 모습을 확인한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무한 경쟁의 사회풍조, 대형마트의 열풍, 행정수도 위헌소송, 삼성사건 등을 떠올리면서 19세기 한 철학자와 같은 심정으로 21세기의 현실을 바라보게 된다. 이제 ‘마르크스의 주장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의 의미를 완전하게 파악할 수는 없어도(마르크스의 주저인 《자본론》을 심층적으로 다룬 것은 아니므로) 그의 이론이 비춰낸 자본주의의 전반의 문제점들이 현대 사회의 당면문제들을 예고했음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철학의 역할은 공허한 관념세계의 구축이 아니라 철저히 현실을 비판하는데 있었다. 그리고 현실에서 완성되는 절대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는 오히려 역사 속에서 끊임없는 실천을 통해 검증되고 재형성 되가는 것이라 여겼다. 그의 묘비명 조차도 철학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라는 신념을 나타내고 있으니 그가 얼마나 현실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고, 철학적 사유를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 않는가의 문제는-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를, 즉 현실성과 힘, 자신의 사유의 차안성을 증명해야 한다.(83쪽)

 

현실성과 실천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의 철학은 ‘지금’, ‘여기’를 위한 고민에 커다란 힘이 된다. 현실에 대한 비판 없이 깨달음 혹은 위로를 제공하는 ‘인생철학’은 이 시대의 부조리를 견딜 수 있게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도전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마르크스의 이상(理想)을 좇아 공산주의 사회를 꿈꾸거나 노동혁명을 위해 투쟁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공산주의 국가를 설립했던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 조차도 국유화를 비롯한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구체적인 정책을 찾기 힘들었다고 한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오히려 ‘현재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주적 운동’(248쪽)으로 묘사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공산주의는 생산의 국유화라는 형식적인 관점을 너머 자본주의 하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사회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는 마르크스의 철학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의 개인과 사회의 문제점들을 진단해 보고 이를 변화시켜나갈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으며, 그동안 일반적으로 정치?사회적으로 통용됐던 그의 이론들을 개인이라는 미시적 영역에까지 적용시켜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했다는 점이 참신했다. 이와 관련해 기억하고 싶은 것은 개인이라는 수준에서의 공산주의란 인간의 소외가 없는 상태, 즉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이 달성되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라는 용어보다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와 같은 표현을 선호했다는 것과도 잘 어울리는 해석이다.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 갈 사회가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겠지만 마르크스의 철학이 혁명이나 투쟁보다는 연합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를 변화시켜 나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이향치'님은?
그래도 길치나 방향치가 아님을 다행으로 여기고 언제나 낯선 곳에서 헤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스무고개 같은 인생을 굽이굽이 살아가는 사람. 단, 스무 살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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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시작 편집부 | 《시작 2012년 여름호》 | 천년의시작 | 2012

 

 

우산을 잃어버리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우산은 갑자기 난처해졌다.
우산은 제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가
남의 바지를 두어 번 슬쩍 적셨다가
좌석에 잠깐 기댔다가
바닥에 널브러져 구두들에게 밟혔다가
슬픈 눈이 잠시 헛것에 초점을 맞추는 사이
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슬며시 없어지고 말았다.

 

버스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던 비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급히 우산을 찾았으나
우산은 제자리에 깊이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잃어버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듯이
오래전부터 비가 그치기만 하면 잃어버려졌다는 듯이
우산은 민첩하게 제 길을 찾아냈다.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듯
스스로 찾아낸 제자리를 영영 떠나지 않았다.
비가 내렸으므로 나는 다시 우산이 필요했다.
비가 더 많이 내렸으므로 잃어버릴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해졌다.
떨어진 꽃잎들은 껌처럼 바닥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사람들 손에는 하나같이 우산이 들려 있었다.

 

우산들은 어떻게 공기 속에서 비의 냄새를 찾아내어
첫 빗방울이 떨어지자마자 활짝 펴지는 것일까.
눈물은 어떻게 슬픔이 지나가는 복잡한 길을 다 읽어 두었다가
슬픔이 터지는 순간 정확하게 흘러내리는 것일까.
저 많은 꽃들은 어디에 숨어 있었다가
봄과 나뭇가지에 마련된 자리를 찾아와 한꺼번에 터지는 것일까.
비가 그치면 저 많은 우산들은
어떻게 제 이름이 새겨져 있는 자리를 찾아 일시에 증발해 버리는 것일까.
흙바닥에 뒤엉켜 있는 꽃잎들은
어떻게 한 치의 오차 없이 저 자리를 찾아낸 것일까.
슬픔이 흘러나오던 자리는 어떻게 감쪽같이 명랑해지는 것일까.
비가 그치자마자 저 많은 손들은
어떻게 우산을 잃어버린 걸 완벽하게 잊은 것일까.

 

내 손에 우산이 없는 걸 보고 비는 더욱 세차게 퍼부었다.

 

 

 

비 올 때가 됐는데……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찹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은 쨍쨍하기만 합니다. 104년만의 가뭄이라죠. 《시작 2012년 여름호》를 대강 훑다가 이 시에 오래 눈이 간 걸 보면 저도 내심 비를 그렸나 봅니다. 우산을 잃어버린 적, 누구나 있을 겁니다. 그때 시인은 우산 너머 비의 근원을 봅니다. 비를 닮은 눈물을 생각합니다. 눈물처럼 한꺼번에 피어나는 꽃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옵니다, 우산이 없는 자신에게로. 이 시작(詩作)의 흐름을 통해 무심코 보는 것에도 갈망의 여러 대상이 내재되어 있음을 확인합니다. 비가 오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은, 또 당신의 마음은 한편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요? 훗날 내리는 빗속에서 어떤 질문을 이어가게 될까요?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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