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 너의 사랑 나의 사랑

 


울리히 벡, 엘리자베트 벡 |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 새물결 | 1999


버뮤다 해변에서 에스키모 어 배우기
여자와 남자, 이성 연인 관계에 대해 다룬 책들은 두 부류로 정리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여성을 위로하고 자신감 있게 행동하라는 식의 조언들, 다른 하나는 남성들에게 좀처럼 알아듣기 힘든 여자들의 말을 일부 해석해 주는 지침서. 서로 다른 별에서 왔다고 해도 될 만큼 둘 사이의 틈은 깊고 넓어 보인다. 그러나 이 간극의 탄생에 대해 비단 어느 한쪽만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남녀 사이에서만 이런 간극을 느낄 것인가. 어쩌면 이는 모든 개인에게 해당되는 간극이 아닐까. 단순히 같은 성별이라고 해서 조금 더 가깝게 느끼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이는 어쩌면 오래된 착각일지도 모른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조금 더 효과적으로 고독해졌다. 그 커다란 고독 앞에서 사람들은 애써 가족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족의 체계는 생존을 강요하는 경쟁 사회와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모든 주말 드라마는 비정한 사회에 대비된 가족애를 그린다. 어떤 짓을 저질러도 가족 사이이기 때문에 용서될 수 있고,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함께 있어서 행복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말한다.

과연 가족은, 가장 작은 단위인 핵가족-남자와 여자-부터 흩어지기 쉬운데,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조부모와 부모, 아이들까지 이어진다면 더 안전할 수 있다고, 인원이 많은 대가족일수록 깨질 수 없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리잔이 하나만 있든 여러 개 놓여 있든 깨지는 건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의 폭력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설령 그 폭력의 도피처로 가족을 이루었더라도, 서로를 위해서 ‘희생’하기란 쉽지 않다. 남자든 여자든 기회의 평등을 부르짖고 개개인의 삶을 지키고자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통적인 성역할에 맞추어 서로가 일부분을 희생한다는 것은 너무나 크고 어려운 선택으로 보인다. 여자에게 전통적인 성역할을 강요하는 것만큼 남자 또한 가족한테서 떨어져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여자는 유능한 커리어우먼과 나쁜 어머니라는 이름 사이에서 갈등한다. 외부의 시선만이 아니라 그들은 서로에게도 그러한 희생을 요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부는 가장 깔끔한 ‘이혼’을 바라보게 된다. 그들은 그 결혼을 하나의 실패로 만들고 또다시 개인적인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 그러나 아이는 ‘절대 대체 불가능한 것’이면서도 ‘결별이 불가능한 존재’다. 아이들은 여전히 그들을 ‘가족’으로 생각한다. 아이들은 어떤 사고가 지나간 후 남는 트라우마, 그들의 포기한 꿈을 상징하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아이를 그런 이유로 낳았던가? 이 파국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 자신의 잘못일까. 사생활을 중시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노동과 생산 관계를 침대에서까지 강요하는 현대 사회의 폭력 때문인가.

최근 페미니즘을 반대한다는 뜻을 밝히고 한 테러 집단으로 이적한 소년이 있다. 소년에게 단지 페미니즘의 의미를 모른다거나 한국 사회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의외로 불평등하다는 얄궂은 비판을 던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야말로 하나의 굴복이 아니던가. 소년의 행동은 어쩌면 이상과 현실의 간극,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듯하지만, 폭력의 규범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사회적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까. 인터넷에서 가장 쉬운 싸움은 남녀 간의 성별 싸움이다. 그 잠재적 이면에는 그들을 평등하게 대우하지 않은 사회 구조가 있다.

울리히와 엘리자베트, 두 사회학자 부부는 한 권의 책 안에서 굳이 하나의 의견으로 통합하려 하지도 않으며, 격렬한 논쟁을 벌이지도 않는다. 그들은 각 장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한다. 반박도 덧붙이는 말도 없다. 이는 그들이 함께 해 온 시간이 적다거나 그들의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다만 그들은 서로가 결국 다른 의견을 지닌 한 명의 인간이라는 점을 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사랑은 어느 누군가에게 희생이나 가해를 강요하는 입장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나가려 한다.


우리는 사랑일까
로미오와 줄리엣은 10대 중후반에 서로를 만났고, 사랑에 빠졌고, 서로를 잊지 못해 죽었다. 과거에 사람들은 그 비극에 대해 눈물지었지만, 현대인들은 냉소적인 시선을 보낸다. 과연 그들이 살아남았더라면 어떤 파국을 맞았을까? 오히려 그들이 환상에 빠진 채 죽은 것이야말로 해피엔딩이 아니었을까?

이성을 풀어 말하면, 다른 성별의 사람이다. 서로 가진 신체 조건과 도덕도 다르다. 손톱에 바른 매니큐어와 능숙하게 맨 넥타이를 황홀경에 빠진 눈빛으로 쳐다보고 그들은 서로 탐색한다. 탐색이 끝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서로에게 아직도 미지의 대륙, 알 수 없어 아름다운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서로가 결국 하나의 육체 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뿐, 해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다름없다는 걸 깨닫게 되지 않을까?

이로 인해 폭력적인 평등이 강요된다.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거나 일정한 계약을 맺을 것, 비즈니스에 기반하는 이상 어떤 환상이나 기대도 성립될 수 없다. 그들은 철저하게 타인이 된다. 만약 계약 조건을 어길 경우 그들은 ‘헤어진다.’ 결별에 대해 왜 그러냐고 캐묻는 연인 앞에서 합리적인 이유를 댄다는 건 ‘귀찮아진’ 그들을 떼어낼 수 있는 명확한 이유이자 그 자신 또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수단이다. 이별을 선언한 사람과 통보를 받은 사람들 모두 ‘쿨해질 것’을 강요받는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무리 안전장치를 매고 뛰어내려봤자 추락은 추락이다.

‘썸’은 일종의 찔러보기라고 할 수 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말처럼, 관계를 시작하기 전, 이 관계가 과연 그가 예상하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확인의 기반에는 결국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 자리잡고 있다. 설령 그의 예상이 맞고 연인이 되더라도 그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불신이 있다. 밀당이라는 기술 또한 연인 관계의 견고성을 불신하는 공식에 불과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서로의 싸움에서 이기려 한다. 설령 그 싸움에서 무조건 항복을 선포하고, 패자로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한다 해도 소용없다. 승자는 자신의 승리에 취하고, 사랑받는 자신을 사랑한다. 사랑은 양자가 필요한 것이다. 한 명만 하는 건 짝사랑일 뿐이다.

사랑이란 서로가 손을 잡는 것, 한 침대를 나누고 같이 아침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서로를 완전하게 소유하고, 어제 누구한테 메시지를 열심히 보냈는지 아는 것마저 사랑의 끝이 아니다. 상대방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일기장을 보여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타인은 영원한 미지의 영역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과 함께 절망을 느낀다. 미지라고 해서 포기하거나 알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 또한 또 다른 포기의 형식일 뿐이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거나 맹신하는 것은 하나의 후퇴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진보란 어쩌면 저자들이 말한 것처럼 틀린 것과 마주하는 시선일지도 모른다. 틀린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새로운 답의 존재가 상정된다.


마지막 밸런타인 데이
과거 중세인들이 사랑의 끝을 죽음이었다고 생각했다면, 현대인들은 사랑의 끝이 무성애자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종교와 같은 것이어서 철저한 믿음과 어리석음을 전제로 한다. 사람들은 똑똑해지기를 원하지, 어리석어지고 싶지 않아 한다. 그들은 절대로 누군가에게 속아넘어가지 않고 실패 없이 살고자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던지는 사랑은 존경받는 한편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것이 된다. 무언가를 극복한 사랑 앞에서 우리는 관객처럼 가만히 박수를 보내거나 조롱을 보내야 성이 풀린다.

이제 우리는 손수 만든 케익이나 꽃, 편지 대신 우리가 준 선물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기 원한다. 전자의 경우 너무 순진해 빠졌거나 우롱의 행위로 해석될 뿐이다. 성욕마저도 감소한다. 끊임없이 전화하고 전화받고, 일하거나 공부해야 하는 삶으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양극단에 위치한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의 먼 존재로 우상화되고 있다. 소설에만 존재한다고 믿으면서도 몇 번이고 현실이라 믿고, 그로 인해 배신당하고 또 회의에 잠기기를 번복한다. 카라마조프 형제 중 이반은 신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지만, 정작 그만이 악마를 본다.

사회 구조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포기하라고 종용한다. 그들이 원하는 건 비즈니스적 관계다. 그러나 아이에게 똑같은 생을 대물림하기 싫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행동은 그들의 예상 밖을 벗어난 것이다. 아이들은 자라서 부모에게 재정적 지원을 해주는 존재가 되어야 했고, 그로 인해 현대 사회에서 노동 시장으로 내몰려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원하는 가족은 끊임없이 자본적 폭력으로 회귀하는 하나의 공장이었다. 이러한 거부는 어쩌면 아직 남아 있는 사랑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아닐까. 여성과 남성을 불문한 거부는 그들의 소망과 사회 구조에 대한 반대를 알려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사회학자인 부부의 시선에 따라 지극히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회귀될 수 있을지언정-아도르노의 말에 반박하며 개인은 소멸할 수 없으며, 철저한 개인주의야말로 새로운 자유의 획득과 새로운 관계의 태동을 알리는, 진정한 존중으로서의 사랑이라는 옹호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온전한 사랑의 포기보다야 훨씬 더 낫지 않을까. 여자가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혹은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건네주는 초콜릿이 가격과 어떤 상술에 넘어가는 어리석음, 일방적인 항복으로 읽히지 않고 순수한 감정으로 읽히기를 바라는 희망처럼.

좋은 책과 서평을 나누고자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펜벗과 함께 만들어 갑니다.
펜벗이란 서평을 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매주 월요일, 성실한 서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2월의 펜벗 서평 주제는 '그 남자, 그 여자'입니다.


| 펜벗 일문일답

●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은 어떻게 고르셨어요? ‘그 남자 그 여자’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 단번에 떠오를 책은 아닌 것 같아요.

사실 주제를 받았을 때 막막했어요. ‘그 남자 그 여자’라는 노래 제목처럼, 왠지 연애소설에 통달해야만 이 주제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전 원래 문학 쪽으로 서평을 주로 써왔고, 그래서 막막하기만 했죠.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남자와 그 여자라는-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두 사람은 연인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철천지원수가 될 수도 있죠. 그 남자와 그 여자 사이에 가능한, 수많은 관계를 상상하다 보니 남녀 관계에 관한 책을 리뷰해 보고 싶었어요. 이런 책 중 가장 유명하고 오래된 책으로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가 있죠. 하지만 이 책에는 현대 사회에는 좀 적용이 불가능한 이론들이 몇 있었어요.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은 예전에 벡 부부의 공동저술이라는 점에서 흥미롭게 생각했던 책이었어요. 사실 처음 읽었을 때, 부부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지 않고 ‘공동 저술’이 가능할지 궁금했어요. 그리고 분쟁 없이 서로의 영역을 얼마나 지킬 수 있을지 호기심도 있었고요. 제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이 책은 남녀 사이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현대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변주해 나가는지 상세하게 적혀 있어요. 제가 선택한 책마다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보통은 여성이나 남성 중 한쪽에게 ‘참으라’는 결론을 내리는 책들이 많아요. 하지만 이 책에서는 여성이나 남성이나 결국 ‘사랑’을 일종의 게임, 승리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느낀다고 지적하죠. 그래서 더 인상 깊었어요. 사랑을 하고 싶은 사람들뿐 아니라 남녀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도 읽어보면 좋은 책일 것 같아요. 그리고 관계의 변화는 곧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하죠. 그래서 리뷰를 써보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어요.

● ‘연애를 책으로 배웠다.’는 말은 가벼운 장난에 가까운 소리입니다. 그런데 실용서가 아닌 문학에서 경험하는 사랑의 감정은 장난으로 넘기기엔 진지하고 깊죠. 소설을 즐겨 읽는 Telmailing 님은 문학을 통해 사랑의 감정을 다스려 본 적 있으신가요?

실연을 당했을 때는 문학이 도움되죠. 사랑을 시작할 때는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의 실용성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니지만요. 사랑을 시작할 때 모든 행복과 불행이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 같아요. 문학을 통해 지나치게 감상이 깊어질 수 있죠. ‘감상적’이라는 말은 예민해지고 섬세해진다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이기주의적인 나르시시즘이 될 확률이 높아요. 이기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충고를 읽지 못해요. 반면 실연을 당했을 때, 모든 문이 자신 앞에서 닫혔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문학은 그 반대로 담담하게 애당초 그들을 위해 저절로 열리는 문은 없다고 말해주죠. 그리고 작가가 인물을 서술할 때, 인물의 행동이나 감정을 합리화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물은 실연당한 자신처럼 허점이 있고, 상처를 받았고, 복수를 하거나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서 안달이 나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제야 자신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저 또한 그랬어요. 그리고 그 순간의 감정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거죠.


●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과 함께 읽으면 좋을 책과 이유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존 버거의 『결혼을 향하여』라는 소설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건강한 남자와 죽음을 앞둔 여자가 서로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에 이르는 흔한 러브스토리지만, 서로가 사랑에 빠지고 죽음을 극복해 결혼을 이루는 과정의 서술은 ‘사랑 때문에’라고 핑계를 대는 대신에 솔직하고 담담하게 진행됩니다. 담론 연구가 현실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분석을 추구한다면, 소설은 현실 너머에서 가능한 희망을 탐색하는 시도라고 생각해요. 진정한 사랑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책을 읽은 다음에는 그 희망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오늘의 책을 리뷰한 'Telmailing'님은?

글을 쓰고 읽을 때마다 행복하고 불행한 사람입니다. 현재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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