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전을 읽는가》 - 왜 읽냐건 웃지요

 


 

이탈로 칼비노 | 《왜 고전을 읽는가》 | 민음사 | 2008

나의 어릴 적 꿈은 시인이었다. 그러나 나는 소위 말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시를 써 당선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나의 시는 언제나 허공을 맴돌 뿐 다른 이들의 마음을 울리지 못했다. 전라북도 무주 산골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나는 어느 추운 겨울날 아이들과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읍내에 하나밖에 없는 편의점을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우리와 함께 마치고 내려온 담임 선생님과 그의 오랜 친구였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그에게 나를 소개했다. 우리 학교 대표로 지난번 글짓기 대회에 나갔던 아이라고, 자네도 읽어보지 않았느냐며 말이다. 그는 나의 이름을 듣고는 "아~, 너 수필 썼었지?" 하며 아는 체를 해 주었다. 그리고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 그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작가 ‘안도현’이라고.

나는 그날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편의점을 떠나 학교 기숙사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가 나의 담임선생님처럼 어느 산골의 교사일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 나는 대학에 진학했고, 그의 이름을 좇아 그의 시들을 읽었다.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들을 후회했다. 오래도록 나의 꿈은 글의 언저리를 따라 있었다. 하지만 수능 점수와 장학금을 따라 진학한 대학은 나에게 오랜 꿈과는 거리가 먼 삶을 선물했다. 초, 중, 고를 지나면서 한 번도 꿈꾸어보지 않았던 '교사'라는 삶을. 나는 교사로 살면서 오래도록 꿈을 잊고 살았다.

꿈을 잊고 책을 읽지 않는 건 매우 쉬운 일이었다. 아이를 낳고, 기르고, 하루를 보내는 데만 집중하면 됐었다. 나는 스스로에게조차 잊히고 있었다. 이제 서른 중반을 찍으며 나는 다시 꿈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제는 꿈이라기보다 바람에 해당하는 일들을 생각했다.

오랜 질문의 답을 찾기라도 할 듯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를 펼쳤다. 하지만 서문을 제외하곤, 이탈리아의 작기인 칼비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칼비노의 렌즈를 통과한 생소한 '고전'들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역자도 밝히고 있듯, 그가 소개하고 있는 작품들 중 몇몇은 아예 우리나라에는 번역조차 되어 있지 않을 만큼 생소하다. 그러나 칼비노의 렌즈는 그 생소함에 다소 활력을 불어 넣는다. 가끔은 시선을 멈추고 밑줄을 긋게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돈키호테의 전신 격에 해당할 만한 ‘티랑 로 블랑’에서,

중요한 것은 이제 기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책이 하나의 텍스트로서 갖는 가치이다. 이것은 책과 삶을 구분하지 않고 책 바깥에서도 신화를 찾고자 하는 돈 키호테의 가치관과는 반대되는 가치관이라 할 수 있다. (91쪽)
라고 말하는 부분이나,

그 순간 삶 자체는 책 안에서 서술되고 있는 형식으로 변모하게 된다. (97쪽)

라고 평하는 부분이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티랑 로 블랑’에서 그가 발견한 돈 키호테의 가치관, 삶과 책의 일치를 푼 문장을 보며,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건네고 때로는 고민을 또 때로는 위안을 준다. 그러나 책은 책 밖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혹 순진한 독자가 책 속의 말들을 따라하고 책이 권하는 일들을 그대로 행해도 책에서 말하는 기적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책은 청춘의 아픔을 논하고 따스한 말을 해 줄 수 있지만 청춘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러나 여전히 돈 키호테와 같이 책 속의 일들과 책 밖의 삶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는 많다. 그러면 왜 책을 읽는가?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고전이 어렵다면, 그 말을 ‘책’으로 바꿔볼 수 있다.

"왜 책을 읽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효율로 또 어떤 이에게는 공감, 또 어떤 이에게는 행동으로 다가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칼비노가 서문의 마지막에 인용하고 있는 시오랑의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어떤 목적이나 유용성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냥" 혹은 "그래서"에서 해당될 만한 ‘소크라테스의 이야기’. 곧 죽음을 선사할 독약이 만들어지는 그 앞에서도 악기를 배우는 소크라테스가 남긴 말이다.

"그래도 죽기 전에 음악 한 소절은 배우지 않겠는가?"

그저 배우고 싶고, 알고 싶다는 욕망만큼이나 강력한 것은 없다. 나를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이 한때 놓아버렸던 꿈의 언저리로 돌아가려는 이유도 그저 그냥 그러고 싶어서다. 그렇게 해 보고 싶은 열망과 정열 때문일 것이다. 칼비노의 책은 서문을 제외하고는 인내심을 가지고 읽었다. 정확히 나는 읽었다. 글자를 말이다. 어려운 내용이었고, 그가 소개한 책들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끔 어디선가 본 듯한 세르반테스, 톨스토이, 디킨스, 헤밍웨이를 만나면 반가울 따름이었다. 그러니 기억에 남은 것도 많지 않다. 다만, 그가 고전을 읽으며 다가서려 했을 삶의 근원을 다시 생각해 본다.

이 책을 덮고 나는 올 한 해 여러 엄마들과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리딩살롱’이라는 이름으로 만나, 한 달에 한 권 책을 읽는다. 나는 엄마들이 왜 그토록 열심히 책을 읽고 고민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들 또한 한때 놓아버린 꿈과 읽고 싶다는 열정에 이끌렸을 것이다. 여전히 책을 읽는 이유, 읽어야 하는 이유는 고민의 대상이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다시 책을 펼치고 이야기를 나눈다. 언젠가 고민의 결과가 한 편의 글로 태어나는 날이 오길 바란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apranihita'님은?

읽고 보고 듣고 느끼고 쓰는 일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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