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뺨에 서쪽을 빛내다》 - 시월에 가을을 건너며

 

 

장석남 | 《뺨에 서쪽을 빛내다》 | 창비 | 2010

 

비 떨어지는 밤길을 조금 걸었다. 물웅덩이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가을의 뺨이 적셔져 갔다. 그런 가을을 향하여 한소리 하는 것 같은 가을비였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소년은 소녀를 불렀다. 소녀는 우산을 쓰고 있지 않았다. 내 마음을 훔쳐간 당신 운운하던 오래전 소년과 소녀가 아니었다. 소년과 소녀는 성장하지 않았다. 퇴화하지도 않았다. 멈추지도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소년과 소녀는 이제 막 만들어진 물웅덩이였다. 나는 뺨으로 비를 맞으면서도 파문이 일지 않도록 물웅덩이를 훌쩍 건넜다.

 

뺨의 도둑

나는 그녀의 분홍 뺨에 난 창을 열고 손을 넣어 자물쇠를 풀고 땅거미와 함께 들어가 가슴을 훔치고 심장을 훔치고 허벅지와 도톰한 아랫배를 훔치고 불두덩을 훔치고 간과 허파를 훔쳤다 허나 날이 새는데도 너무 많이 훔치는 바람에 그만 다 지고 나올 수가 없었다 이번엔 그녀가 나의 붉은 뺨을 열고 들어왔다 봄비처럼 그녀의 손이 쓰윽 들어왔다 나는 두 다리가 모두 풀려 연못물이 되어 그녀의 뺨이나 비추며 고요히 고요히 파문을 기다렸다

 

나는 이제 사소하기를 바라고 있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기를 희망하지 않는다. 누구든 나를 아주 사소한 것인 양 통과하여도 괜찮다. 나의 문을 열었을 때 너의 문이 보이지 않는다고 좌절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를 향하여 문을 열어두지 않는다고 투정부리지도 않을 것이다. 너무나 사소해서 꽃이든 구름이든 스스럼없이 드나드는 문을 지닐 것이다. 나는 그렇게 아주 사소한 사내가 되어갈 것이다.

 

문 열고 나가는 꽃 보아라
꽃 위에 맵시 좋은 구름결들 보아라
옷고름 풀린 봄볕을 보아라 (‘문 열고 나가는 꽃 보아라’ 중)

 

몇몇 시집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다 결국 다시 장석남의 시집을 집었다. 시집을 읽는 동안 헐레벌떡 뛰어드느라 댓돌 아래에 마구 벗어놓은 신발을 누군가가 슬쩍 숨기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기척을 느낀다. 세상을 등지고 눈을 감은 채 오래오래 술래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이제야 술래의 부역에서 벗어나 숨는 이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장석남의 시집을 마저 읽는다.

 

술래 2

사내의 곡괭이가 사내의 머리 위 하늘을 한번씩 찌른다
돌을 파내고 나면 삽으로 흙을 퍼낸다
파인 하늘에도 피가 흐르고 흉터가 남는다
무릎이 지평 아래로 잠긴다
허리가 잠긴다
그리고 조금씩 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미망인과도 같은 물이 고여서
앙금을 가라앉히고는 차츰
사물을 비추기 시작한다
사내를 비추기 시작한다
 
나는 그 물그림자의 술래였다

 

물웅덩이를 건너는 동안 나는 사로잡히지 않았다. 나는 소년과 소녀로부터 한참을 멀어졌다. 나이에 맞는 발걸음이 있다면 그 발걸음처럼 걷지 않으려 했다. 눈동자를 가두고 있는 티셔츠와 마주쳤으나 모른 체 지나쳤다. 항아리를 닮아 에로틱한 치마가 일으킨 바람에도 멈추지 않았다. 흐르는 채로 조율 당하는 가을밤을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아서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오랜만에 칠흑 밤길을 걸어가보니
꽝꽝한 소나무숲이 너 혼자 오느냐 묻고
나는 눈썹을 조금 떨고 지나쳐 산모퉁이에 이르렀다
저만치 귀신과 함께 쉰살이 서 있다 (‘인제에서’ 중)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가 잦아들었다. 길을 건너는데 횡단보도의 흰 부분이 하나의 봉우리 같았다. 나는 네 개의 건널목을 건넜고, 그때마다 봉우리를 하나씩 넘었다. 그럼에도 어둠을 쏟아내는 인적 드문 길을 찾는 데에 실패하였다. 더욱 깊은 골짜기를 향하여, 어둠이 바위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절벽 한 켠을 향하여 이동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였다. 다행인지 아직 나의 ‘쉰 살’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kosinski'님은?

우주에 부는 바람, 세상의 모퉁이에 있는 절벽, 직각으로 떨어져 죽는 새를 생각하는 것. 책, 영화, 음악, 사진, 아내, 고양이 용이와 들녘과 함께 하는 것. Uaral, Spitz, 보르헤스, 박상륭, 미셸 우엘벡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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