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화 캐릭터의 '명예의 전당' - <내 인생의 만화책>


 

한국만화 캐릭터의 '명예의 전당' - <내 인생의 만화책>


초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일찌감치 계를 하나 만들었으니 일명 ‘만화계’였다. 매주 500원씩 모아 <IQ 점프>를 사 돌려보고, 3주에 한 번씩 책을 갖는 거였다. 그때 부모님에게 돈을 받기 위해 내세운, ‘이 책을 보면 IQ가 올라간다’는 허무맹랑한 이유가 효력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무척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았다. 하지만 만화와의 인연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고작해야 <드래곤볼> <슬램덩크> 그리고 목이 거의 빠질 때쯤 한 권씩 나오는 <열혈강호> 정도만 읽었다. 그래서 올해가 ‘한국만화 100주년’이란 말을 들었을 때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서가에 꽂힌 <내 인생의 만화책>의 표지를 보는데, 이상하게 끌렸다.

<내 인생의 만화책>은 <소년챔프> <영챔프> 등의 편집장을 지내고, 현재 대원씨아이(주) 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만화 고수 황민호가 ‘한국만화 100년 특별기획’으로 낸 책이다. ‘캐릭터로 읽는 20세기 한국만화사’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책에는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인에게 사랑받은 28명(?)의 캐릭터가 들어있다. 저자는 김용환 작가의 ‘코주부’에서 시작해 백성민의 ‘토끼’까지 캐릭터별로 그들의 발자취를 남긴다. 이는 만화를 심히 사랑한 만화 애호가의 애정 어린 리뷰이자, 곧 한국만화의 역사이다. 이정도면 이 책을 ‘한국 만화 캐릭터의 명예의 전당’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책을 펼치면 먼저 웃음이 나온다. 코너 뒤에 무서운 개가 앉아 있자 함께 가던 여성에게 ‘LADY FIRST’를 말하는 매너남 ‘코주부’(김용환), 당시 3천만 원짜리 초호가 저택을 거저먹으려는(?) ‘꺼벙이’(길창덕), 꿈속 야구 한일전에서 만루 홈런을 쳤다고 동네 야구부를 만든 ‘번데기 야구단’(박수동) 등. 수십 년이 지난 캐릭터들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생명력을 갖고 있다. 평범한 자신들을 닮은 만화 주인공들이 펼치는 유머 속에서 서민들이 위로를 받는 건 당연한 일. 여기서 잠시 1980년대 샐러리맨들의 초상이었던 ‘고도리’(김수정)를 만나보자.

상황은 이렇다. 고도리는 동기가 과장까지 승진하는 동안 진득하니 말단 자리를 지키고 있는 좀 모자란 샐러리맨이다.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돌아오고, 그날 이후로 온몸이 아프다. 병원에 간 고도리는 의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다. “획일적인 패턴에서 오는 인간의 파괴 본성이 돌파구를 찾지 못해 축적된 스트레스가 심리적으로 무기력 왜소증, 대인공포, 강박관념, 심리 불안 작용을 한 것입니다.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꾀해 보십시오. 타인에게 구애 받지 말고 변신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219쪽) 다음 이어지는 컷에는 회의장에서 레게 머리에, 슬리퍼를 ‘짝짝’ 거리고 있는 고도리가 앉아 있다. (왜 마음이 ‘짠’하지.)
 


‘고도리’ ⓒ김수정


물론 웃음이 다가 아니다. ‘고바우’(김성환)는 위트와 유머, 촌철살인의 풍자와 해악으로 권력층을 꼬집었고, ‘일지매’(고우영)는 역사소설을 바탕으로 권력의 천적, 민중의 영웅으로 우뚝 섰다. 또 무협만화 주인공 ‘불나비’(김민)는 목탁 대신 검을 든 구도자가 되어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 ‘최강타’(박봉성)는 복수와 한을 포용과 공생의 단계로 승화시키려는 활인술의 경지를 선보인다. 희대의 청춘스타 ‘오혜성’(이현세)이 보이는 지고지순한 사랑(혹은 맹목적인 사랑)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이렇듯 책 속의 만화 캐릭터들은 책 밖으로 생생히 전달된다. 이는 캐릭터 자체의 힘은 물론이요, 그들을 소개하는 저자의 솜씨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번에는 황민호의 깊이 있는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홍경래의 난을 모티브로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를 온 몸으로 살아간 ‘토끼’(백성민)에 대한 저자의 말이다.

그러나 <토끼>는 개동의 죽음을 모든 것이 허무하게 끝나는 것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홍경래의 난’에 대한 <토끼>의 역사인식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개동을 향해 총을 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개동의 안타까운 죽음을 불러왔을 뿐 아니라 총 소리 때문에 눈사태가 일어나고 그 눈사태는 결국 총을 쏜 김기와 토벌군들을 개동의 시신과 똑같은 처지로 만들어놓는다. 개동이나 김기나, 봉기군이나 토벌군이나, 양반이나 민초나 아무런 구별 없이 모두를 눈사태 밑으로 한가지로 밀어 넣음으로써 <토끼>는 ‘홍경래의 난’이 꿈꾸었던 대동의 세계를 실현시킨다. (346~348쪽)
 


‘토끼’ ⓒ백성민


이 밖에도 자기 이름이 언급되지 않아 섭섭해 할 캐릭터들이 많이 있다. ‘질긴 생명력, 막강한 파워의 소년 장사 주먹대장(김원빈)’, ‘본격 SF만화의 탄생을 알린 한국형 슈퍼맨 라이파이(산호)’, ‘관습의 굴레를 벗어던진 용기 있는 여인 다모(방학기)’, ‘만화의 위상을 높여준 영악한 초록 공룡 둘리(김수정)’, ‘희생과 복수의 전도사 바른생활 사나이 구영탄(고행석)’,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 희생당한 여성 변금련(배금택)’, ‘10대 독자들과 완벽한 정서공감대를 이룬 10대의 분신 남궁건(이명진)’ 등 수다맨도 이들의 면면을 한 번에 설명하지는 못하리라.

책을 보며 캐릭터에 푹 빠지다 보니 ‘더 많은 캐릭터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귀동냥으로나마 들었던 캐릭터들이 더 있기 때문이다. 하긴 모든 캐릭터를 한 권의 책에 담는다는 건 무리겠다. 개인적으로, <내 인생의 만화책>은 100주년을 맞아 새롭게 시작할 한국만화 캐릭터 열전의 서막으로 부족함이 없는 책이라 생각한다. 부디 다른 캐릭터들이 숨 쉴 수 있는, 2000년대 이후의 캐릭터도 담을 수 있는 2권, 3권, 4권, 5권 등이 꾸준히 나와 주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나이 서른 넘어 만화방에 가는 친구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본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이번 주말에는 친구와 손잡고 만화방에 가서 흥미진진한 주인공들을 직접 만나봐야겠다. 반디(ak2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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