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나를 떠나 너에게로

 

 

정호승 | 《여행》 | 창비 | 2013

 

지난 시간 나는 너에게 부대끼며 몇 번인가 울었다. 네가 너이기만 한 것이 부당하다는 듯 억울한 얼굴을 가장했었다. 타인은 지옥이라고, 나는 누구에게도 타인이지 않은 것처럼 너를 비난하는 데 골몰했었다. 나는 나이기만 한 채로 상처받은 역을 연기했었다. 자기연민에 심취했었다. 이런 나에게, 모든 ‘너’에게로 다가간 시인이 말을 한다. “너는 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니/ 언제까지 여기에 머물려고 그러니/ 이곳은 더 이상 머물 곳이 아니야” (16쪽, ‘여행가방’)

 

여행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
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
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릴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이다

 

이미 떠나 있는 이의 시선을 빌리자 여기에 홀로 있는 내가 보인다. 나만 있고 나만 있을 이곳에, 무시로 먹었던 마음과 달리 한 번도 제대로 떠나지 못한 내가 고여 있다. 번번이 여기에 멈춰선 원인을 너의 탓으로 돌리고, 빈약한 생으로 나이만 먹고 있는 내가 나로서 병들어간다. 너는 여전히 멀고 나는 아직 사랑을 모른다. 하여 잠시도 “아름다운 인간”이 되지 못한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진다. “내가 잠시 아름다운 인간이 될 수 있”기를 (38쪽, ‘바닷가’) 바라, 먼저 떠난 시의 말에 귀 기울인다.

 

지푸라기

 

나는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게 아니다
먼지를 일으키며 바람 따라 떠도는 게 아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을 오직 기다릴 뿐이다
내일도 슬퍼하고 오늘도 슬퍼하는
인생은 언제 어디서나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당신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다시 일어서길 기다릴 뿐이다
물과 바람과 맑은 햇살과
새소리가 섞인 진흙이 되어
허물어진 당신의 집을 다시 짓는
단단한 흙벽돌이 되길 바랄 뿐이다

 

그러므로 나를 떠나 너에게로 가는 길은 더 이상 “지푸라기라도 잡고 다시 일어서길 기다릴” 게 아니라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을 오직 기다릴 뿐”인 지푸라기가 되어야 함을, 이해한다.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 (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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