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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말이 되면, 괜히 기분이 설렌다. 다음 달이 된다 해서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는데, 참 이상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설레는 건, 이번 달의 과오는 잊힐 것 같고, 새로운 무언가가 기다릴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월말이 되면 어디론가 떠나,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상상을 한다. 마음은 이미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 있다.

“어디로 가실 건가요?” 음, 어디로 가지. 특별히 정해놓은 곳은 없는데. “그냥 아무 데나 주세요.” “아무 데나요?” “네, 아무 데나요.” 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 낯선 곳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런데 이 상상을 현실 세계에서 ‘진짜’ 하는 사람이 있다. R이라 불리는 여행자 노동효. 그가 궁금해 <길 위의 칸타빌레>를 펼쳐본다.

R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 같지는 않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문학을 좋아하고, 졸업 후 인터넷방송국과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근무했다. 그가 다른 점이 있다면, “세상을 처음 보는 듯한 그 시선을 잃지 않겠다”는 것쯤. 그걸 잃으면 이미 죽은 것과 같고,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좀비와 다를 바가 없단다. 뭐야, 그럼 내가 좀비야? 가뜩이나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변하고 있는데. 부아가 치밀지만, 좀비가 되고 싶지는 않아 화를 꾹 참고 책장을 넘긴다.

좀비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 - 먼저 눈을 평소보다 조금 크게 뜬다. 그리고 어린 아이가 된 것처럼, 세상을 처음 보는 것처럼, 세 살배기 아기를 끌어다 망막 뒤에 앉히고 주변을 찬찬히 둘러본다. 낯선 장소일수록 좋고, 이동 중이면 더더욱 좋다. 그래, 여행이란 당신이 좀비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인 것이다.(p 17)


여행이라. ‘손쉬운’ 방법을 알려주니 앞선 화가 조금은 풀린다. 그런데 왜 한국이야. 그것도 좁고 구불어진 국도를. 이왕이면 넓은 세상을 품고, 빠르게 질주하는 고속도로가 낫지. 뭐, 시비를 걸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글로벌 시대 그리고 ‘속도전’이 유행인 지금 그의 방식은 왠지 낡아 보인다. 갑자기 R이 변명을 하기 시작한다.

“오래전 영국에서 1년간 체류생활을 마치고 수로와 육로만을 이용해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횡단한 뒤 인천으로 귀국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부산으로 내려오면 이 땅의 풍경을 감탄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산천을 두고 어디를 그렇게 떠돌았던 것일까” 구차한(?) 변명처럼 들렸지만, ‘해외에 가겠다’고 큰소리 쳤지만, 아직 한 번도 인천국제공항을 가보지 못한 나는, 조금 위안이 됐다. 그리고...

나는 구부러지는 길을 사랑한다. 그 길의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그리고 그 알 수 없음에 이끌려 대로를 벗어나 샛길로, 샛길을 지나 오솔길로 들어서곤 했다. 오솔길의 끝에선 때로 하늘과 맞닿은 개간지가 펼쳐지기도 했고, 저곳에 올라서면 저 너머엔 또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나는 궁금해하곤 했다.(p 178)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 서서히 그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비틀즈의 ‘STRAWBERRY FIELD FOREVER’를 틀고, 이성복 시인의 <남해 금산>을 읊조리며, 핸들을 꺾는 그의 모습이 무척이나 자유로워 보인다. 목적에 얽매이지 않은 자만이 얻을 수 있다는 자유인가. 그는 아마 길에서 비틀즈의 노래를 따라 불렀으리라. 길 위의 칸타빌레. 이제 나도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근데 여행을 한지가 너무 오래돼서 여행 일정을 어떻게 짜야할지 모르겠다. 한창 고민을 하고 있는데 R이 슬쩍 귓속말을 한다. “자, 지금 당장 짐을 챙기고 길을 떠나라! 숙박 예약은? 잠은 어디서 자지? 차편은? 그런 건 잊으라. 그건 길이 알아서 다 챙겨줄 테니. 언제나 그러하듯이.”

책장을 넘기는 동안, 직접 가본 것은 아니지만, R과 함께 여행을 다녔다. 젓갈 안주에 시원한 소주로 축배를 든 안면도, 초식동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제주의 푸른 초원, 태풍의 중심에서 덜컹거리는 해안경비정을 타고 찾은 보길도, 다른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미묘한 맛을 느낄 수 있었던 섬진강 발원지 데미샘 등. R은 여행 내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 김승옥의 <무진기행> 등 많은 책 이야기를 들려줬다. 영화와 음악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했는데, 영화 얘기를 할 때는 내가 낄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그리고 R이 얘기해준 자신의 기억, 아버지와의 추억을 들을 때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올 여름, 보길도로 가는 방파제에서 R을 만난다면, 시원한 맥주 한 캔 건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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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반디앤루니스